아름다운 우리나라/경상도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 가다(2021년 11월 3일~5일까지의 기록)

seoyeoul 2022. 1. 5. 17:39

안동하면 하회마을, 퇴계 이황, 도산서원 등 유교와 관련된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안동처럼 유교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고, 유교 문화재가 많이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안동에 있는 유교 관련된 유물·유적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과연 유교에 관련된 유물·유적만 안동을 잘 표현한 것일까?

2021년 10월에 경기남부보훈지청에서 국내 사적지 탐방프로그램인 슬기로운 탐방생활이라는 공모가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국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응모를 했고, 선정이 되었다. 그리고 113일부터 5일까지 23일 동안 안동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둘러보았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여태까지는 몰랐던 안동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된 부분이 많다. 유교 문화의 꽃이라고만 알았던 안동의 다른 모습,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을 소개하겠다.

 

안동에서의 첫날은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의 역사를 찾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는데 목적을 두고 건립한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을 제일 먼저 방문했고, 기념관 뒤에 있는 협동학교 설립지인 가산서당도 둘러보았다.

그 후 협동학교 교사인 백하구려와 일송 김동삼 생가를 방문했다,

백하구려는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이 1885년에 지은 가옥이다. 1907년 내앞마을 앞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들어섰는데, 협동학교를 반대하던 김대락은 1909년 에 이르러서는 신교육을 수용하고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백하구려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는 인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하고, 김대략은 1911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주로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 가옥을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 건립 자금에 보탰다.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던 김동삼 선생의 생가이다. 김동삼선생은 만주로 망명해 1911년부터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서서 1914년에 백서농장 장주가 되었고,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 참모장이 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다가 1931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신 분이다.

둘째 날 오전에는 안동 시내에 있는 안동시장 3.1운동 만세 시위지, 안동 군청·경찰서·법원 터 일대, 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지인 보광학교 터, 안동의 3.1운동 모임장소인 안동교회를 방문했다.

오후에는 북부지역에 있는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와 이육사 생가터, 이육사 기념관를 방문했는데, 이육사 기념관에서는 육사선생님의 딸인 옥비여사님을 만나서 여사님 기억속에 남아있는 아버지 육사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마지막 날, 월영교 근처를 지나는데 3.1운동기념비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길래 일정에는 없었지만 이곳도 둘러보았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의열단 일원으로 도쿄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열사 기념비이다. 한국사능력시험 공부를 하던 중에 최태성선생님이 김지섭열사 관련한 학생들과의 일화를 소개해서 잊지않고 있던 이름인데 이곳에서 기념비를 마주하게 되어서 남다른 감정이 들었다. 김지섭열사의 업적을 소개하는 비가 너무 더러워 글씨가 잘 안보이길래 깨끗이 닦기도 하였다.

이번 일정 중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임청각이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로 이상룡을 비롯하여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이상룡은 누구인가?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의 유서깊은 명문가 고성 이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에 맞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에 나섰으며, 협동학교를 열고 근대교육을 통한 실력양성 노선을 걸었고, 또한 신민회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해외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한다.

갖은 노력에도 결국 경술국치를 맞게 되자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하인들을 해방시키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일가친척과 더불어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만주땅 서간도에 집결한 민족 지도자들은 터전을 잡고 신흥무관학교 등의 배움의 장을 열어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지는데, 이상룡 선생은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서로군정서의 최고 책임자인 독판으로 간도·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노선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해서 1925년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내의 노선갈등 통합과 독립운동 세력 전체의 통합을 위해 여러 가지로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통합의 길은 멀기만 하여 결국 1928년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귀환하였다.

만주로 귀환한 후 민족유일당 운동,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노선과 계파들을 통합하는 노력을 계속하여 만주의 무장독립운동단체 3부의 통합, 국민부 창설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냈지만,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며 독립운동의 길은 더욱 험난해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운동 투사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1932615, 노령과 병환으로 결국 만주 땅에서 서거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422월 일제가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을 일컫던 말)의 집안이라고 하여 본래 99칸의 고택 중 50여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헐고 임청각 앞에 중앙선 철도를 건설했다. 민족정기를 끊고 다시는 이곳에서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작년 1216일 오후 736분 중앙선 마지막 기차가 임청각 앞을 지나갔다. 독립운동의 산실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앞을 지나는 중앙선 철도가 80여 년 만에 멈췄고, 지난 130일 이 철도를 철거했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왜 진즉에 못했는지.....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개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구국 투쟁에 헌신한 석주 선생의 생가이며 민족정기의 근원인 임청각의 온전한 복원이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임청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상룡선생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전부터 임청각의 주인들은 벼슬하기보다 학문에 힘썼고, 배운 것을 몸으로 실천하여 이름이 높았다. 한 가문이 그 명예를 500년이나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품위를 지키고 어려울 때 주위를 돌보고 베푸는 정신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필요성을 모르는, 혹은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임청각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 어디든 독립운동에 헌신하지 않은 지역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동은 전국 시·군에서 가장 많은 369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도시이다. 안동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슬기로운 탐방생활>을 통하여 여태까지 내가 단편적으로 생각했던 안동(유교문화의 꽃)이 아닌 새로운 안동(독립운동의 성지)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