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이라는 말의 의미는 ‘작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울러 ‘사리’라는 말은 ‘길다’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바닷가 어촌에서는 ‘조금’과 ‘사리’의 개념을 모르고서는 일자 무식쟁이 취급을 받았으며, 어촌에서 삶을 영위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는 말의 어원을 찾다 보면 조수간만의 자연현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태양과 지구 그리고 달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되는 조수간만 현상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순응의 섭리를 통해 인간사 곡절을 살피게 된다.
태양 · 지구 · 달이 일 직선상에 놓였을 때를 ‘대조기(=사리, 바닷물 고저 차가 크다)’라 하고, 태양 · 지구 · 달이 직각을 이룰 때를 ‘소조기(=조금, 바닷물 고저 차가 적다)’라 이른다.
바닷물이 육지로 가장 많이 들어오는 만조와 바닷물이 육지에서 가장 멀리 나가는 간조는 6시간마다 반복된다. 만조(들물, 밀려오고)와 간조(썰물, 밀려가고)로 바뀌는 잠시 시간을 ‘정조’라 하는데 보편적으로 45분(시기에 따라 30~90분 까지)정도 시간을 물의 흐름이 정지할 때를 ‘선다(물이 섰다)’라고 한다.
바닷물의 ‘썰물’과 ‘들물’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바닷물이 멀리까지 밀려가고 밀려올 때 바닷물의 고저 차가 커서 물 흐름이 세어지는 현상 시기를 ‘사리’라 한다. 바닷가 사람들은 “한 사리 든다”고 하여 횡재수를 일컫는다. 사리때 물의 큰 조류를 따라 이동하는 물고기를 잡는 풍어를 비유하는 것이다.
‘사리’의 반대되는 현상을 ‘조금’이라 한다. ‘조금’은 물의 흐름이 정지되어 개펄 드러남이 적고, 이때에는 물흐름 또한 약하고 시간이 짧아 어로행위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만 바다에 나가 물때에 따라 이동하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조금’ 때에는 어로행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다.
‘조금’때에는 바다에 나가도 어획량이 부진하였다. 갯벌이 많이 드러나지 않으니 부녀자들 위주의 맨손 어업을 할 수 없었고, 이때 남자들은 자연스레 배를 선창에 붙여두고 어구를 손질하거나 배를 정비하곤 했다.
육지에서 계속 생활할 기회가 많았던 이때가 부부가 함께 오붓하게 정을 살피는 시기였기에 바닷가 마을에는 비슷한 시기에 생일을 갖는 아이들 ‘조금새끼’가 많이 잉태되었고 한 시기에 태어났다.
또한, 겨울철이 되면 바닷물고기들이 깊은 먼바다로 들어가고 풍랑이 거세지면서 추위가 몰려와 얼음이 끼이면 어로행위를 펼칠 수 없게 되어 어촌남자들은 한가하게 집에 머물며 심신을 가다듬는 시기가 된다. 그리고, 매서운 바람이 잦아지는 정월 이후 새롭게 선단을 꾸미게 되는데, 한 해 동안 목숨을 건 어로행위의 손발을 맞추어야 할 동료(뱃동서)들이 이 때 규합된다.
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금새끼’들은 어른이되어 ‘뱃동서’로 뭉치게 되는 것이다.
어민들에게는 생계의 바탕이 되는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는데, 특히 무엇보다도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과 염원은 제의 형태의 풍어제나 뱃고사 외에도 어촌 금기 사항에 잘 담겨져 있으며, 출어 또는 조업 즈음하여 반드시 금하거나 피해야 할 것 등을 정해놓고 지켜왔다.
금기 사항을 보면 배의 건조 후 첫 출어 시 부부 행위를 금하며 머리와 손톱을 깍지 않는다, 출어 시 떠나는 남편이나 자식은 남는 가족에게 인사하지 않으며 가족 또한 아무 말 없이 떠나 보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배에 타지 않는다, 시체를 조업 중에 보게 되면 정중히 모셔야 후환이 없고 풍어가 된다, 출어 중 집안에 아기를 낳게 되면 3-7일간 집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쇠붙이를 조업 중 바다에 버리는 것은 배의 침몰과 연관되므로 금지된다, 어선에 여자는 승선할 수 없고 출어 직전에 여자가 앞을 지나면 조업을 포기한다 등이다.
한배를 타야 하는 선원들끼리는 ‘뱃동서’라 호칭했다. 아마도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는 한 운명체라는 목숨부지의 동무라는 개념에서 동서라 했던 것 같다. ‘동무’는 수평적 개념의 우리라면 ‘동서’는 수직 질서 개념의 우리라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배를 타더라도 경험이 동반하는 직능에 따라 엄격한 명령의 상하체계가 이루어졌고, 한동아리라고는 하지만 상하개념의 직능의 ‘동서’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웠던 것 이다.
일사불란한 팀웍을 이루기 위해 한동네 사람들로 구성된 ‘뱃동서’들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한꺼번에 사망하기도 하였기에 바닷가 마을은 한날한시의 제사가 많았다. 배를 타고 나가 어로를 하다가 풍랑이나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게 되면 남겨진 가족들은 찾지 못한 시신을 대신하여 망자의 유품을 일정한 날을 정해 매장하고 기일을 합의해 제사를 치렀던 것이다.
한배를 탔던 ‘뱃동서’들의 부인들 또한 공통 공유적 질서가 발동되었음을 통해 가족들의 유기적 관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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