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화성시의 서쪽 송산면과 서신면, 마도면의 경계점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구봉산. 봉우리가 아홉이라 해서 구봉산이라는데, 실제 도드라진 아홉 봉우리가 미약해서 헤아려보기 어렵다. 아마도 옛날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뱃길의 순조로운 항해를 위해 뭍의 지형을 살피도록 하는 경향에 따라 구봉산이라 불리웠을 터이다.
구봉산은 날씨가 쾌청할 땐 당진지역과 인천 연안까지의 경기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확보함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 당성이 구봉산을 구렁이 휘감듯 자리하고 있다.
당성은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던 당성과 그 주변을 소개하려고 한다.
당성을 둘러보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방문자센터를 지나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걸어 올라가면 남양 홍씨 문중이 세운 당성사적비가 당성의 시작임을 알려준다. 산줄기를 따라 좌우로 1,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당성의 성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당성은 구봉산(九峰山165.7m)의 산곡을 둘러싼 퇴뫼식 토석혼합 산성으로 본성(本城)과 자성(子城), 장성(長城)으로 연계된다.
성의 높이는 약 2.5m, 하단부의 폭은 7∼8m이며 테뫼형(山頂式)과 포곡형(包谷形)을 결합한 복합식으로, 현재 동문·남문·북문의 터와 우물터, 싸울아비들의 숙영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안 정상에 망해루(望海樓) 추정의 건물터 초석이 남아 있다. 본성은 1,150m 포곡식(包谷式)이고 자성은 약 300m로 본성 서쪽 모퉁이에 이중으로 붙여져 있고, 장성은 본성을 중심으로 서남, 북동 양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산성입구에는 길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는 오른쪽 길을 택해서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걸으니 왼쪽으로 우물지가 보인다. 이곳은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하는데,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우물지 동쪽편으로는 건물터도 남아있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성곽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이 곳에서 만난 어떤 분께서는 초등학교때에는 이곳으로 소풍와서 성곽위를 뛰어 다니며 놀았었고, 산버찌와 싱아도 따 먹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식물은 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북문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앞이 탁 트인 곳이 나타나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물길이 마산수로이다. 그 앞에 공장과 동네가 보이는데 그곳은 옛날에는 바다였던 곳이다. 당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서해안 간척사업으로 바닷물이 막히고 육지로 변한 것이다.
당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육지와 연결된 곳은 갯벌이었다. 바닷물이 들어와 성을 감싸면 당성은 섬의 방어력과 최고의 해자, 산성의 접근성을 모두 갖춘 천혜의 요새가 된다. 당성 망해루에서 먼바다를 조망하며 적들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각종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저기 마산포도 보인다. 마산포는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함대가 주둔했던 곳이고,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했던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가기 전에 마산포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때 묵었던 최씨종택이 마산포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청나라로 강제로 잡혀가던 그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가슴이 아프다.
마산수로 뒤쪽으로 화량진성도 보인다. 세종때에 화량진의 관할은 왕모대가 있는 ‘영종포(永宗浦)’를 비롯해 ‘초지량(草芝梁)’과 ‘제물량(濟物梁)’ 등으로, 지금의 화성시와 안산시, 인천시를 관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화량진에 있던 ‘좌도수군 첨절제사영’은 인조 때인 1629년에 한양의 방어를 목적으로 지금의 교동도로 옮기면서 폐영이 되었다. 따라서 번성했던 화량진성 역시 이때를 기점으로 폐성이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됐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시화방조제 공사를 하라고 제 몸을 내어줘 허리가 뚝 잘려버린 형도도 보이고, 해운산도 보인다. 이곳에는 봉수가 있던 곳이다.
화성시에는 3개의 연변 봉수가 있다. 우정면 화산리의 흥천산봉수, 당성 남쪽 봉우리에 있는 염불산봉수, 그리고 송산면 독지리의 해운산봉수가 그것이다.
흥천산봉수는 남쪽의 평택 괴태길 곶 봉수의 신호를 받아 다시 염불산봉수로 전한다. 염불산봉수는 다시 그 신호를 북쪽의 해운산봉수에 전하고, 해운산봉수는 다시 그 신호를 시흥 오질이봉수로 전한다. 지금껏 화성에 남아 있는 봉수대들은 서로 8~9Km거리를 두고 있으며 경기만 연안을 감제하면서 남쪽 연변 봉수의 신호를 중앙에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화랑진 일대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좌도수군 첨절제사영이 항시 주둔하고 있어 인근 염불산봉수와 유기적으로 연계됐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망해루지이다.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망해루는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 팔각모양의 집터가 있었고, 그 뒤(아래쪽)로 운동장같이 평평한 터가 있는데 아마도 집회와 훈련을 하는데 사용하였던 것 같다. 바다에서 후두두둑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니, 외적이 몰려올 때마다 싸울아비들이 경계하던 시름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곳을 다녀간 선인 묵객들이 당성을 밟으며 남긴 시 한 수 읊어본다
아침에 당성(唐城)을 떠나 서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가니,
연파(煙波)가 아득하여 끝이 없네.
원 하건데 만곡(萬斛)이나 드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배를 멍에하여
바다를 지나 고래를 베려 하노라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양도호부편에 실린 최숙정의 시이다.
망해루지 옆에 기와 파편이 모아 쌓여져 있다. 3차 발굴조사에서 1차 성벽 남쪽부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당(唐)’자가 새겨진 진기와명문이 발견되었으며, 성벽 발굴현장 바로 위에서는 건물초석이 발견되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당(唐)’자가 새겨진 기와는 현재의 당성이 과거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당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획기적인 고고학적 증거라고 하겠다.
4차 발굴조사에서 발굴된 ‘본피모’명문기와는 지방에서 3번째로 확인된 기와로서 신라 육부의 중앙관리부서가 당성의 축조에 관여하여 이 지역의 유력한 세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했다. 이와 함께 ‘한산’명 기와의 출토는 한산주의 성격과 지리적 범위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우리는 당성이라고 하면 이 성 자체만을 생각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서신면과 송산면, 마도면 일대 남양반도의 행정명으로 인식되었다.
당성지역의 첫 지배자는 백제였으며, 당시의 명칭은 당항성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하여 한성지역을 정복하여 고구려에 편입되었는데, 고구려는 이곳의 명칭을 당성으로 바꾸었다. 이후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고 마침내 경기일대에서 고구려를 몰아냈으며, 555년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 동맹을 깨고 독자적으로 당성을 차지하여 중국으로 통교하는 유일한 항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성을 차지하였던 세력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고대 문물을 수입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신라의 당성확보는 내륙의 국가에서 해양국가로 발전하고 해외로 뻗어가는 기틀을 마련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또, 중국에서 로마까지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의 끝이 중국의 시안이 아니었고, 신라까지 이어졌다는 증거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곳 당성은 실크로드가 어떻게 신라까지 연결될 수 있는지 그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이라고 하겠다.
서문지를 통하여 능선을 잡아 숲길을 따라 내려왔는데, 자성(子城)의 흔적이 남아있어 심신의 무거움을 덜어낸다. 가까운 곳에 있는 신흥사에서 울리는 독경소리며 풍경소리가 살며시 들리는데 이것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나가며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이자 통일신라시대 중국과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던 당성과, 그 주변지역을 1,500여년의 시간 속에 과거와 현재를 파노라마처럼 전개해 보았다.
바다였던 주변이 육지로 변해 많은 부분이 역사적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하여 당성의 중요성과 역사적 가치의 재조명을 하게 되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세계와의 소통이 이루어졌던 신라 최대의 항구 당성이 서해안 시대를 맞아 잊혀진 산성이 아니라, 한반도 미래를 열어줄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문화재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본다.
2020년 9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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