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은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사회집단의 성격과 문화를 보여주며, 시대를 이해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개화기에 복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옷차림새가 바뀌었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별기군이 서양 복식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다. 1900년대에서 1910년 사이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상류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1920년대가 되면 양복이 의생활 문화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차츰 일반 사람에게 퍼졌다. 경성과 대도시에서 일본 사람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 관리와 상인도 곧잘 입었다. 1930년대에는 유학생이 들어오면서 양복이 크게 번졌다. 조선인 엘리트는 두루마기 대신 양복에 스프링코트와 오버코트를 입었으며 셔츠, 넥타이, 모자, 구두, 지팡이, 회중시계, 넥타이핀 등의 장신구를 갖추었다. 1920년대 충무로 일대에는 일본인 양복점이 100여 개, 종로 일대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양복점이 50개나 되었다.
여성의 양장은 양복보다 조금 늦게 보급되었다. 개화기에 서양 문물을 만날 수 있었던 고관부인, 외교관 부인, 유학생이 양장을 입기 시작했다. 양장이 퍼지기에 앞서 여성 한복의 개량이 있었는데, 장옷과 쓰개치마를 벗은 것이었다. 하지만 개화 여성이라 할지라도 장옷을 벗고 곧바로 맨 얼굴로 다닌다는 것은 아직 낯 뜨거운 일이었기에 장옷을 대신하여 검정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얼굴 가리개로 쓰던 우산은 차츰 햇볕을 가리는 양산으로 바뀌어 실용성과 함께 여성의 장식용으로 자리 잡았다. 1910년대에는 ‘한복을 즐겨 입자’는 주장과 함께 한복 개량 운동이 일어났다. 짧은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는 스타일의 1920~1930년대 개량 한복은 오랫동안 신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한복의 개량으로 속적삼, 단속곳, 속속곳, 다리속곳, 너른바지 등의 속옷이 사라져 갔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차츰 양장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양재법이나 양재강습소에 대한 기사가 신문이나 잡지 지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양장은 종류가 다양해졌고 차츰 지방까지 보급되었다.
남녀의 머리 모양은 여러 번 고비를 겪으며 바뀌었다. 1895년 일제는 위생에 이롭고 활동하기 편하다면서 단발령을 내렸는데, 단발령을 내린 개화파 정권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상투를 억지로 또는 스스로 자르는 사람이 차츰 늘었다. 1910년대 후반에는 종로에 조선 남성을 위한 이발소가 등장하고, 1920년대 중반에는 도회지에 살던 남성 가운데 반쯤이 단발을 하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1930년대가 되면 남성의 단발은 더 이상 패션이 아니었다. 갖가지 머리 모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단발령을 계기로 짧은 시기에 강제로 단발했지만, 여성은 스스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단발을 했다. 1920년대 여성의 단발은 사회주의가 유행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자유주의 여성은 위생적이고 편리하며 합리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단발을 했고, 사회주의 여성은 여성해방과 반봉건운동 차원에서 단발을 했다. 여성에게 단발은 그저 머리털을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반항이며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신여성인 ‘모던 걸(modern girl)’을 ‘모단(毛斷) 걸’로 불렀고 보수적인 남성들은 이를 ‘못된 걸’로 바꾸어 조롱했다. 남성의 단발은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여성의 단발은 전통을 파괴하는 일로 비난했다. 1930년대가 되자 젊은 여성이 단발 위에 ‘물결을 일으키는’ 파마를 하기 시작했다. 파마를 하려면 거대한 기계를 벗으로 삼고 유쾌하지 못한 전파를 참아야 했으며, 한 번 파마할 때 쌀 두섬 값을 치러야 하는 등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가장 참신한 현대미’인 파마는 크게 유행했으며, 1942년 경성에서만 1개월 동안 파마하는 여성이 4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여성은 패션을 통해서 여성 해방 의지를 표현하였다. 신여성을 중심으로 서구의 근대적인 합리주의와 여성 해방의 선진적 조류를 받아들인 여성들은 외모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근대적인 자기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였으므로, 개량한복 · 양장 · 단발 등의 서구적 외모의 추구를 통해 기존의 유교적 도덕관을 벗어나려고 하였고, 가부장제 하에서의 억압에서 자유스러워지고자 하였다.
개화기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이 땅의 패션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으며, 유행의 물결을 탔다. 192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본격적인 유행의 물결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거세졌고, 많은 사람이 그 유행에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유행을 일종의 전염병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무렵 유행이 무턱대고 서구를 따라가거나 언론매체의 선전과 광고 등에서 영향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유행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했고, 한 개인의 욕망과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던 식민지 민중에게 유행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참고도서
1. 송찬섭 外(2020), 근현대 속의 한국,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 김은정 (2004), 근대적 표상으로서의 여성패션 연구, 아시아여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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