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식은 차츰 일반인에게도 알려졌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양사람들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숭늉 마시듯 마신다”고 소개했다.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기호품 중 커피에 대해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가배 · 가비 · 가피 · 고히 · 카피 · 커피 등은 모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커피를 칭하던 용어들이다. 개화기에는 가배, 가비, 가피와 카피 등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신문에는 커피, 카피, 고히 등으로 쓰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화기 민간에서는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커피색이 검고 쓴맛이 나서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송대 교재에는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맛보았고 그 뒤 왕족과 귀족 사이의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뒤에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할 때 관여하였던 퍼스벌 로웰(Percival Lowell)의 저서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의하면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그가 조선 고위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 변 별장에서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커피가 이미 상류계층에서 유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의 영향력은 일본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전개 또한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커피문화 또한 그 정착과 전개과정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이 직·간접적으로 작용되었는데, 1910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나라 커피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정세와 국제정세 또한 함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소비할 수 있는 계층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고, 커피의 경우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제조국의 수출입 규제가 고스란히 커피문화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일제는 강점 직후 1919년 3·1운동까지 식민적 지배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강력한 억압정치로 조선을 통제하였으며, 경제적인 수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 토지의 약 40%를 약탈하여, 그들의 국책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져 일본인 지주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한국 농민의 50%는 춘궁기에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다가 유민이 되어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이처럼 일반 민중들의 삶은 상당히 피폐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당시 커피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상은 특권계층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 ·1운동 이후 일제는 종전의 무단정치에서 표면상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식량 수탈과 식민지농업 정책으로 우리나라의 자작농은 감퇴일로의 길을 걸었고 소작농과 화전민으로 전전하던 농민들은 일본이나 중국 등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커피문화는 여전히 일반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호텔 등지에서 음식과 함께 판매하던 커피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문적으로 커피를 파는 다방 혹은 카페라는 이름의 커피전문점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다방이 출현한 것은 1923년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명동과 충무로에 ‘후다미(二見)’라는 다방이 처음으로 생겨났고, 이어서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충무로에 또 들어섰다. 이후 종로 일대에도 다방이 출현하였고, 당시 명동은 상당히 다방이 많아서 ‘다방의 거리’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최대의 카페거리는 단연 충무로였다. 1927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충무로에서 영업을 하던 카페업자가 5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경제적인 여건과 대비해 보았을 때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고 할 수 있다.
커피는 여전히 상류층을 중심으로 소비되는 고급 물품이었으나, 종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비의 폭이 많았던 것이 1920년대이다. 다방이나 카페를 통해서만 커피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신문 기사로 ‘집에서 커피를 맛있게 끓이는 법’에 대해 소개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커피, 다방, 카페는 모던 걸, 모던 보이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시절의 아픔을 이곳에서 달랬다. 시대적 여건상 사교모임은 물론 집회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강연이나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극장과 카페는 젊은이들에겐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고, 일종의 사교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광복을 맞이한 우리는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미군이 통치한 미 군정기가 수립되면서 커피가 보다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커피값은 고가를 유지하고 있어서 일반 대중들이 마시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음료였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문화의 진정한 대중화는 1960년대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도서
1. 송찬섭 外(2020), 근현대 속의 한국,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 강찬호(2013), 문헌을 통해 본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 관광연구 제28권 제3호
'공부 >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성 (0) | 2021.12.25 |
---|---|
근대적인 유행과 패션이 식민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0) | 2021.12.24 |
<나의 남명학 읽기-남명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읽고 (0) | 2021.12.24 |
화성지역의 근대화 (0) | 2021.12.24 |
2017년 3월 27일 향문연 답사 - 홍법사 (0) | 2017.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