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지역의 근대화
Ⅰ서론
조선 말기까지 40여개 면을 관찰하던 수원은 1914년 식민정부의 시책에 따라 행정구역에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는 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변동으로, 당시 수원은 16개의 면을 진위군에 넘겨주고, 남양군 전역과 광주군 2개면, 안산군 3개면을 편입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면통합을 거쳐 21면을 관할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현 평택시 포승면· 현덕면·오성면·청북면이 당시 수원에서 진위로 이월된 지역이며, 현 화성시 남양동(구 남양면, 음덕면)·마도면·송산면·서신면·비봉면 등은 1914년 이전까지는 남양도호부의 땅이었다. 또한 수원면이 수원시로, 청호면이 오산시로, 의왕면이 의왕시로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현재 화성시는 100년 전 상황에서 일부는 남양 땅이었으며, 반대로 비교적 최근에 편입된 현 수원·오산·평택시 일부 지역은 수백년 이상 대대로 화성 땅이었다.
1949년에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이 되었고, 그후 2001년에 화성시로 거듭 태어났다.
여기에서는 근현대 시기의 화성의 교통, 시장, 교육의 변천 과정을 알아보고, 화성지역의 3.1만세운동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려고 한다.
Ⅱ 본론
근현대시기의 교통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가장 먼저 도로개수사업을 추진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추진한 도로개수는 내륙과 항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와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의 지방도로를 개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을 보다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7년부터 시작하여 1911년에 끝난 도로개수사업은 서울 목포선의 광주와 목포를 이어주는 구간을 비롯하여 전국에 24개 구간에 도로가 신설되거나 개수되었는데, 이를 당시 신작로라 불렀다. 이 시기에 화성지역에는 수원-강릉선의 일부인 수원과 이천을 잇는 2등급 50km를 1908년에 개통하였다.
1913년 개수된 도로 중 화성을 통과하는 도로는 경성-목포간의 목포가도의 수원과 진위, 인천과 수원을 잇는 수원군내와 수원과 남양을 잇는 남양가도의 남양과 수원군내의 도로 등이다. 수원은 용인, 이천, 여주, 남양 등지로 통하는 도로의 개수가 이루어져 자동차와 인력거 등의 통행이 빈번하였다. 당시 수원에는 자동차 1대, 인력거 95대, 우마차 135대, 화차가 110대 있었다고 한다. 오산의 경우 수원과 발안, 양성 등지를 잇는 도로가 있었으나 개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불편하였으며, 화물운송의 경우 오산에서 진위까지 잇는 도로와 오산에서 발안장까지 잇는 도로는 우차가 통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도로는 교통의 중심이 철도로 바뀜에 따라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근대적 의미에서 한국에 철도부설 교섭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전후의 시기였다. 1892년 일본은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인천 간의 철도 실사 및 측량을 군대의 비호를 받으면서 국가 정책적으로 실시하였다.
화성지역을 통과하는 경부선 부설을 일제가 구상한 것은 일본 국내에서 정한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였으며, 1890년대 들어 한층 구체화되었다.
1911년 수원역, 병점역, 오산역의 동향을 보면 수원역은 각종 화물의 수송량이 많았으며, 오산역은 수원보다 경제규모나 생활인구가 적었지만 사업의 발달로 화성지역의 각종 물자의 집산이 빈번해 화물의 수송량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병점역 역시 역세 주변이 미곡의 산지인 관계로 쌀의 수송량이 많았다.
화성지역에는 경부선 외에 수여선과 수인선이 있었다. 1928년 설림된 조선경동선 철도주식회사가 부설한 수여선은 수원을 기점으로 이천 여주에 이르는 74km,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간 54km의 철도이다. 이 철도는 사철로서 여주, 이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미곡과 시탄을 수원을 거쳐 인천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설되었다.
2. 시장의 발전과 변화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조선후기 화성에는 모두 3곳의 장시가 있었는데, 남양에 위치한 부내장, 팔탄면 구장리(혹은 하저리)에 위치한 춘교장, 송산면 사강면에 위치한 신기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화성의 정기시장망에는 변화가 생겼다. 조선후기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부내장 즉 남양장과 신기장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춘교장은 없어졌다. 대신 우정면 조암리에 삼괴장, 향남면 발안리에 발안장이 각각 생겨났다. 삼괴장은 원래 장안면 사랑리에 열리던 것이 일제 초기 신작로의 개수로 교통이 편리해진 이웃한 우정면 조암리로 이전한 것으로 보이며, 발안장도 같은 이유로 팔탄면 구장리에서 1913년 향남면 발안리로 이설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시장촌은 점차 그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되는데, 대개 장터를 중심으로 중심가로를 따라 상설점포가 들어서면서 가촌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시장촌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경제적 교환의 장으로서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사교·오락·정보교환 등 사회 문화적 기능도 지니게 되면서 점차 지역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적 기능도 갖게되어 사강리·조암리·발안리의 시장촌은 각각 송산면·우정면·향남면의 면소재지가 되었다.
1921년 조선총독부관보에 따르면 신기시장은 1921년 10월 7일자로 송산면 사강리에 개설이 허가되었는데, 개설 주기는 닷새가 아닌 열흘이고 장날은 음력 1, 11, 21일이었다. 그 후 1923년 7월 12일 자로 매 2, 7일에 개설되는 오일장으로 변경되었다. 신기시장은 개설 초기에는 거래액 규모가 4개 시장 중 가정 적었고 시장이 위치한 사강리는 서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입지로 당시 도로 및 철도 교통 발달의 혜택에서도 소외되었다. 이로 인해 지역 내에서는 정기 자동차 운행이 현안이 되었다. 한예로, 당시 신문에는 1924년 11월 20일부터 수원과 남양을 운행하던 자동차가 사강리시장까지 연장 운행하기로 하고 자동차 운행을 위한 도로 정비사업까지 진행하였으나, 도로 정비가 늦어지면서 자동차 운행이 다음 해로 연기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제 강점기 사강리시장에는 포목점과 술집 등의 상설점포가 있었고, 일본인과 중국인의 상점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화재에 취약한데, 당시에도 시장에 있던 상설점포에서 화재가 종종 발생하여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남양부 읍치에 개설된 까닭에 읍내장 혹은 부내장으로 불리던 남양시장은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시기부터 존재한 시장이다. 남양시장의 장날은 1923년 기준 시가지상권부터 3, 8일로 변경되어 나타나고, 그 후로 변화없이 현재까지 3, 8일장으로 유지되고 있다. 남양시장은 장날에 변화는 없었지만 1930년대 말에 한 차례 장터의 변경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1939년 5월 17일과 8월 22일 신문에는 남양소학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서 기존 교사를 수리하여 남양시장을 이전하려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편 장터는 단순히 상품만 사고 파는 장소가 아니다. 장터는 해당 지역 주민의 공용공간으로서 만남의 장소이자 커뮤니케이션의 장소였다. 축제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중요 절기나 명절에 장터에서 이루어지던 씨름대회나 척사대회 때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남양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칠월 백중에 씨름대회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우정읍 조암리에서 개설되는 조암시장은 화성 지역 4개 시장 중에서 역사가 가장 짧은 시장이다. 이 시장은 1926년 10월 당시 우정면장이 경기도에 시장 개설 허가를 신청하여 1927년 5월 31일자로 허가되었고 그 해 11월 13일부터 시장이 서기 시작하였다. 조암시장에는 1934년 8월부터 가축시장이 병설되었다. 1934년 8월 14일 동아일보에 가축시장 개장 소식과 함께 주민들의 가축시장개설을 기념한 각희대회(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팔탄면에 개설되던 팔탄장을 이은 것으로 알려진 발안시장은 1899년에 간행된 ‘수원군읍지’에 등장한 이래로 장날의 변화없이 현재까지 유지되는 시장이다. 발안시장은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화성지역 시장들 중에서 세력도 큰 편이었기 때문에 다른 장들보다 이른 시기에 시장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추었다. 정기 자동차 운행도 다른 장들에 비하여 빨랐다. 수원-발안-안중 노선의 자동차 운행도 1927년 7월 16일부터 매일 1회 왕복하기 시작하였고, 발안-경부선 오산역 노선의 자동차 운행도 1929년 9월 10일부터 오전과 오후 각 한 차례씩 왕복 운행하다가 1931년 11월 27일 부터는 수원역전-발안-오산-김량(용인)으로 1일 1회 운행하는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발안시장에서는 전화 개통도 다른 장들에 비해 빨랐다. 조암시장이 있는 조암리가 1938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전화가 개설되었는데 발안시장은 그보다 11년이나 앞선 1927년 7월에 발안시장에 전화 개통이 이루어졌다.
다른 시장들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교류가 행해지는 장소이고, 때로는 윷놀이대회나 씨름대회 등이 개최되는 떠들썩한 축제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으로 장터에 다수의 주민이 모이는 행사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1930년 8월 26일 동아일보에는 한 신문사의 발안분국 주최로 주민을 위한 위안회를 발안시장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돌연 발안주제소 순경들이 모든 행사를 금지하는 바람에 위안회가 개최되지 못한 일이 있었고, 주민들의 비난이 자자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들 시장촌은 1970년대 이후 교통·통신의 발달, 도시화 등에 의해 큰 변화를 겪었지만 아직도 각각 남양장(1·6일), 사강장(2·7일), 조암장(4·9일), 발안장(5·10일)의 정기 시장이 열리고 있다. 현재 사강, 남양, 발안 세 곳의 시장을 돌아 보았지만 옛날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3. 교육
우리나라 근대교육은 198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1895년 고종은‘교육입국조서’를 반표하여 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소학교령’을 반포함과 동시에 전국에 50개(경기도 9개)의 관립소학교를 설치하였다.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의 설립은 근대식 학제도입의 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근대교육의 출발로 평가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8년 남양군 음덕면(현 남양동)에 화성지역 최초의 공립학교 남양공립소학교가 개교하면서 남양지역에도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공립학교 외에도 화성지역에는 서당, 야학, 강습소등 많은 사설교육기관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사설교육기관은 민족교육을 지향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며 독립운동가가 직접 운영하거나 후원하는 곳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898년 개교한 남양공립소학교는 음덕리에 소재한 남양도호부 관아의 집사청을 차입하고 김재현을 교원으로 임용, 35명의 아동들을 모집하여 효경, 통감, 소학, 천자문 등 전통 서당의 교재들을 가르쳤다. 1906년 ‘보통학교령’에 따라 공립남양보통학교로 명칭이 바뀌고 훈도 겸 교감으로 일본인 교사 좌토원웅조가 초빙교수로 배치되어 학교운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08년에는 홍승하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남양보흥학교를 편입하고 남양풍화당의 회당을 기부받아 2학급으로 편성함으로써 학교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공립남양보통학교는 이후 남양공립소학교, 남양국민학교를 거쳐 현재 남양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20여년 간 남양지역 초등교육을 담당해왔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보통학교 3면 1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따라 화성지역에는 1898년 남양공립소학교 이후 22년만인 1920년에 두 번째 학교인 송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이후 화성지역에는 팔탄(1922), 삼괴(현 장안)·동탄(1923), 향남(1925), 정남(1930), 비봉(1931), 서신(1932), 봉담·매송·양감(1933), 마도(1935), 우정(1936) 등 12개교가 설치되었다. 또 직업교육 강화를 위해 화수(1934), 발안(1935), 송라(1936), 장안(1936), 수화(1938) 등 5개 간이학교가 설치되었다.
한편 지방유지가 중심이 되어 설립된 사학교육기관에서는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다. 이 시기 화성지역에도 보신강습소(양감, 1923), 광명의 숙(장안, 1923 이전), 양명의 숙(장안, 1923 이전), 대성강습소(정남, 1925), 장안강습소(1927), 양명학원(우정, 1931), 정신학술강습소(정남, 1933) 등의 사립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해방이후 확대된 교육기회와 교육수요의 증가로 학교설립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화성지역에서는 1960년대까지 34개의 학교(초등19, 중등10, 고등5개교)가 개교하여 증가 추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해방 이전 중등교육의 불모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해방 이후의 중고등교육 기관의 설립은 화성현대교육사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후 학교 설립이 급격히 감소하여 1990년대까지 7개교(초등2, 중등2, 고등3)에 그쳤으며 오히려 농촌 인구의 감소 등으로 폐교하는 학교가 증가하였다.
최근 화성시는 대규모 택지개발 등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화성지역의 학교는 양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데, 2020년 현재 화성지역에는 초등학교 97개교(분교3), 중학교 42개교, 고등학교 28개교, 특수학교 3개교가 운영 중이다.
4. 화성 3.1만세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화성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폭력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송산, 사강에서 시작하여 우정, 장안 그리고 발안 쪽을 중심으로 확산이 되었다.
1919년 송산면사무소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화성지역의 3.1만세운동의 첫 사례로 언급된다. 3월 26일 시작 후 3월 28일 사강 장날을 맞아 확산되었는데, 당시 만세시위 주민들을 진압하려 했던 일본인 노구치 순사부장이 지금의 사강시장 옆 수협건물 앞에서 오히려 주민들에게 처단을 당할 만큼 그 기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송산 3.1기념공원에 세워진 송산 3.1운동 기념탑은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하나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송산초등학교 후문 근처에는 작은 규모의 삼일동산이 조성되어있고, 3.1만세운동 추모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과거 송산면사무소의 뒷산이었던 곳으로 3월 28일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기념비가 말없이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발안지역의 경우 인근 우정, 장안지역 만세운동과 연계되어 1919년 3월 31일 만세운동이 전개된다. 당시 발안장을 기점으로 모여든 천여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이끈 인물이 바로 이정근 의사이다.
당시 주민들은 발안천에서 돌을 주워 투척하며 10여 곳 일본인 상점을 파괴 방화하는등 시위와 발안주재소에 투척했다. 또한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지금도 투석에 쓸 돌을 주웠던 발안천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러한 영향으로 시장의 이름 역시 발안만세시장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발안주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정근 의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과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벽화가 그려져 있어, 그 날의 함성을 느낄 수가 있다.
우정, 장안의 경우 마을을 돌면서 시위대를 규합해 만세운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파출소 격인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주재소 건물 안에 숨어 만세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대어 시위군중 수명이 총상을 입거나 사망하였다. 급기야 격노한 만세시위 군중은 초가집 주재소 건물에 불을 붙였다. 결국 불타오르는 주재소 건물을 뛰쳐나와 총을 쏘며 달아나는 일본인 순사부장 ‘가와바다 도요타’ 순사를 2km 즈음 추격하여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기에 이른다. 이후 방치되었진 가와바다의 주검은 돌무더기가 봉분을 이루다고 전한다.
이러한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은 단순한 만세시위에 그치지 않고 일제를 몰아내는 해방운동의 양상으로 향남인근의 일본인들은 화성지역을 벗어나 피난을 가기에 이른다. 군경을 동원한 일제의 보복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핵심인물의 추적이 아닌 무자비한 무작위적 지역주민을 탄압하는 보복행위로 만세운동에 주도적 참여한 마을의 가옥과 재산을 일괄 불태우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였다. 보복활동의 거점을 향남면 발안주재소로 하여 인근의 지역을 순회하며 보복하였다. 우정,장안지역을 보복하기에 지나는 장안면 수촌마을은 장안우정지역 만세봉기의 주요 지도인물 살았으며 천도교와 개신교 교당이 소재한 마을이기에 오며 가며 8차례에 걸친 보복을 당하여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당시 일제의 보복은 화성지역 송산서신지역 210채, 우정 장안과 향남지역에서 150여 가옥을 불태우고 400여명을 체포하여 그중 12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5년~6개월 옥살이를 하게되었다. 8차례에 걸처 화수리를 비롯한 수촌리 등의 마을에 대해 방화를 하고, 주민들에 대해 탄압했다. 이때 피난하지 못한 이들이 죽는가 하면, 상당수 주민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었다. 이때 수촌리는 일제의 보복으로 42채 중 38채가 불에 타 사라질 만큼 그 피해가 막심했다. 지금도 마을의 입구에 ‘수촌리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역사의 현장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우정, 장안지역과 발안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아리타중위가 수비병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와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벌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23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는데,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스코필드,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등에 의해 해외에 폭로가 되면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제암리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순국기념관이 있다. 제암리는 거룩한 민족저항운동과 수난의 현장이다. 지금도 제암리 뒷동산 묘소에는 1919년 4월 15일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엉켜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사람들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다. 제암리 주민들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열히 일어났고, 함께 희생되었다. 그날의 희생자들이 보여준 민족의식과 단합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대화합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라 하겠다. ·
Ⅲ. 결론
1914년 일제가 전국의 군,면 단위 행정구역를 통합할 때 남양군과 수원군을 통합하여 수원군이라 하였다. 이후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할 때 여타의 지역이 화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2001년에는 시로 승격되어 주도적 성장과 도시계획을 실행하여 년간 3~4만 명의 인구유입과 도시화 성장속도 전국 1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근대 시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초기의 화성시는 수원시의 부속된 상황이었기에 도시가 크게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여러 곳(병점역, 남양초등학교, 남양시장, 발안시장, 사강시장)을 방문했는데, 그 당시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교통, 시장의 변화, 교육부분은 화성시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고, 화성지역의 3.1만세운동의 발자취는 관련된 장소 를 직접 방문하여 그때의 함성을 느껴보았다.
참고도서
1. 화성시 향토박물관 제8회 기획전 <화성의 근현대 교육>, 화성시, 2013.
2. 상업과 전통시장, 화성시사편찬위원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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