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재미있는 역사이야기 33

조선시대 읍치에 반드시 설치되었던 기본시설

조선시대 읍치에 반드시 설치되었던 기본시설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진행된 읍치에 대한 시설로는 통치관련 시설과 교육시설, 제사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객사와 공아와 같은 시설들은 국왕에 위한 직접 통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권위와 위엄을 갖춘 통치시설로 정비되었고, 그 외에 교육시설인 향교와 함께 문묘, 사직단, 성황단 등의 제사시설, 군사시설, 창고시설, 상업시설 등을 배치하였다. 읍성의 평면형태는 주로 방형(方形), 원형(圓形), 자연지세형(自然地勢形) 등이 있는데 초기 평지의 읍성은 방형으로 각 방향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으며, 시대의 경과에 따라 원형에 가깝게 조성되었는데 성 둘레가 클수록 자연지세형에 따랐다. 성내에는 중앙 북측에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두고 일부 주민을 수용하여 행정..

삼국시대 도성의 독특한 특징

삼국시대 도성의 독특한 특징 세 가지 도성은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궁성과 관부 및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으로,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을 의미한다. 즉, 도성은 특정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는 읍을 중심으로 외곽에 담장 형태의 시설물을 설치하여 방어 및 통치체계를 갖춘 구조를 말한다.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도(都)와 성(城)이 결합된 것으로, 시(市) 대신 사용된 성의 등장이 주목된다. 도읍을 감싸는 성은 경계 설정과 방어체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도성의 구성요소에서 성·문·중심건물은 성을 구성하는 필수 구성 요소 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종묘 등과 같은 의례시설은 환도산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도로의 ..

조금새끼, 뱃동서

‘조금’이라는 말의 의미는 ‘작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울러 ‘사리’라는 말은 ‘길다’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바닷가 어촌에서는 ‘조금’과 ‘사리’의 개념을 모르고서는 일자 무식쟁이 취급을 받았으며, 어촌에서 삶을 영위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는 말의 어원을 찾다 보면 조수간만의 자연현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태양과 지구 그리고 달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되는 조수간만 현상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순응의 섭리를 통해 인간사 곡절을 살피게 된다. 태양 · 지구 · 달이 일 직선상에 놓였을 때를 ‘대조기(=사리, 바닷물 고저 차가 크다)’라 하고, 태양 · 지구 · 달이 직각을 이룰 때를 ‘소조기(=조금, 바닷물 고저 차가 적다)’라 이른다. 바닷물이 육지로 가장 많이 들어오는 만조와 바닷물이 육지에서 ..

당성

들어가며 화성시의 서쪽 송산면과 서신면, 마도면의 경계점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구봉산. 봉우리가 아홉이라 해서 구봉산이라는데, 실제 도드라진 아홉 봉우리가 미약해서 헤아려보기 어렵다. 아마도 옛날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뱃길의 순조로운 항해를 위해 뭍의 지형을 살피도록 하는 경향에 따라 구봉산이라 불리웠을 터이다. 구봉산은 날씨가 쾌청할 땐 당진지역과 인천 연안까지의 경기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확보함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 당성이 구봉산을 구렁이 휘감듯 자리하고 있다. 당성은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던 당..

근대적인 유행과 패션이 식민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의복은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사회집단의 성격과 문화를 보여주며, 시대를 이해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개화기에 복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옷차림새가 바뀌었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별기군이 서양 복식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다. 1900년대에서 1910년 사이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상류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1920년대가 되면 양복이 의생활 문화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차츰 일반 사람에게 퍼졌다. 경성과 대도시에서 일본 사람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 관리와 상인도 곧잘 입었다. 193..

근대에 들어온 기호식품인 '커피'가 우리문화에 수용되는 역사적, 문화적 과정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식은 차츰 일반인에게도 알려졌다. 유길준은 에서 “서양사람들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숭늉 마시듯 마신다”고 소개했다.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기호품 중 커피에 대해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가배 · 가비 · 가피 · 고히 · 카피 · 커피 등은 모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커피를 칭하던 용어들이다. 개화기에는 가배, 가비, 가피와 카피 등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신문에는 커피, 카피, 고히 등으로 쓰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화기 민간에서는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커피색이 검고 쓴맛이 나서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송대 교재에는 1896년 아관파천 때 ..

<나의 남명학 읽기-남명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읽고

Ⅰ. 서론 선비란 학식과 사람 됨됨이를 모두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어질고 학식을 두루 갖춘 사람을 뜻한다. 전통문화권에서 선비란 말은 ‘학문을 닦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이자 성현의 도를 배워 세상에 실천하는 유학자’로 이해된다. 비록 세속의 부와 권력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한 학문적 노력에 평생을 경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만 읽고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선비는 대부분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인데, 이들은 옛 성현이 설파한 도를 배우고 몸소 익혀 자기 것을 만들어 세상에 실천하는 자들로 현대에 많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이황, 이이 등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 중기를 살았던 남명 조식은 선비의 표상으로..

화성지역의 근대화

화성지역의 근대화 Ⅰ서론 조선 말기까지 40여개 면을 관찰하던 수원은 1914년 식민정부의 시책에 따라 행정구역에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는 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변동으로, 당시 수원은 16개의 면을 진위군에 넘겨주고, 남양군 전역과 광주군 2개면, 안산군 3개면을 편입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면통합을 거쳐 21면을 관할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현 평택시 포승면· 현덕면·오성면·청북면이 당시 수원에서 진위로 이월된 지역이며, 현 화성시 남양동(구 남양면, 음덕면)·마도면·송산면·서신면·비봉면 등은 1914년 이전까지는 남양도호부의 땅이었다. 또한 수원면이 수원시로, 청호면이 오산시로, 의왕면이 의왕시로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현재 화성시는 100년 전 상황에서 일부는 남양 땅이었으며, 반대로..

2017년 2월 22일 향문연 <남양지역의 특산물 석화(石花) >

남양지역의 특산물 석화(石花) 오늘날 해안 갯벌을 매립 간척하여 석화가 매우 귀해졌기에 화성지역의 명산 토산물의 명성을 잃었지만 예전 화성지역 연안에서 채취한 굴과 관련한 이야기를 통해 그 명성을 살필 수 있다. '남양원님 굴회 물 마시듯 한다' '남양사돈에게 굴 자랑 하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