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재미있는 역사이야기 33

화성 마하리 고분군

이 글은 주현동의 논문 와 임영동의 논문 를 정리 편집한 것입니다 마하리 고분군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북쪽에 자리한 태봉산(223m)과 남쪽의 상방산(154m)을 잇는 능선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가지 능선의 구릉에 자리한다 화성 마하리 고분군은 1995년 경부고속철도 경기도 구간에 대한 개발에 앞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곳은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65기의 백제 한성기 고분이 조사되었고, 이후 2018년도에 화성 마하리 고분군 현상변경허가구역 내에서 백제 한성기 석곽묘 47기와 횡혈식 석실분 6기가 조사되면서 주목받았다.. 마하리 고분군은 단순토광묘→수혈식 석곽묘→횡혈식 석실분으로 묘제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 한성기 지방에서..

2023년 2월 17일 기도 <오늘의 말씀:마태복음 16:13-2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사랑과 믿음의 고백을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에 내 생각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내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하옵소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 몸이 성전인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김구선생님의 부인인 최준례여사의 묘비 글

김구선생과 선생의어머니, 어린 두아들이 같이 찍은 사진에 나와있는 묘비의 해석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묘비에 써있는 이문자를 해석하는 방법 기역부터 치읓까지 쭉 쓰고 그 아래 1부터 10까지 숫자를 넣는다. 그렇게 하면 ‘ㄹㄴㄴㄴ해’는 4222년이다. 4222년은 단기이다. 서기로 하면 1889년이다. ‘대한민국 ㅂ해’라 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ㅂ’ 즉 6년째 되는 해, 즉 1924년을 뜻한다. 해석해 보면 1889년 3월 19일에 나고, 1924년 1월 1일에 죽었다는 뜻이다. 출생일은 단기로 표현했지만, 사망일은 단기를 사용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해서 대한민국6년으로 표기한 것이다. 우리는 고조선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

한국전쟁이 남북한 국내정치에 미친 영향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체계를 가진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 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9년 북한의 전쟁 계획을 반대했던 스탈린은 1950년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초기 북한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였다. 10월 중순 중국의 참전으로 후퇴했다가 38선 부근에서 고착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다. 전선이 고착되자 1951년 7월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 협상을 시작하여 2년 후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전쟁의 결과 남북한에는 총 52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같은 인적손실 피해는 당시 남북한 인구를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관련해서, 3상회의 내용과 그 의미 그리고 좌우익의 반응, 대응의 결과와 영향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즉시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일반명령 1호를 통해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분할 점령하도록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점령 지역과 독일에 협력했던 국가들을 처리하는 원칙을 만들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를 가질 때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 시켰는데,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것이 곧 ‘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었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는 크게 4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

섬을 '셤 '또는 '염'으로 부르던 시대가 있었다

'섬'이라는 말이 옛날에는 '셤'이라고 쓰인 적도 있고, 또 '염'이라고 쓰인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양대 김정수교수님이 오래전에 한글 학회의 땅이름 사전에서 정리한 자료를 보내 주셨는데, "염"이 "섬"과 똑 같은 뜻으로 쓰인 예가 아주 많고, 드물게 "여"(암초)의 뜻으로도 쓰여 있는데, 그 어원은 동일한 것이라고 합니다. “섬”을 뜻하는 “염”의 보기들: 구볌(구비염) [섬] 경기-김포-양촌-학운- 사들구지 남쪽 개펄에 있는 섬. 구비염 [섬] 경기-김포-양촌-학운- =>구볌. 돌염(도서) [섬] 경기-김포-대곶-약암- 약산 서남쪽에 있는 섬. 돌이 많음. 마얌(마염, 매염, 응도) [섬] 인천-중-중산- 월촌 북쪽 약 4㎞ 거리에 있는 섬. 넓이 17.4㏊. 매가 새끼치고 살았음. 섬 안에는 4㏊..

내가 조선시대의 양반이었다면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남양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부친과 숙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려움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즈음 들어 천자문을 통해 글자를 익히고, 소학, 효경 등 사서삼경을 익히기 시작하였고, 문장 짓는 법을 학습하였다. 열 다섯 살 무렵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절에 들어가 경서를 읽고 문장 가다듬기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과거준비를 위해 향리에서 운영하는 거접들의 무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과거 입시를 위해 경서, 성리서, 역사서 등을 탐독하여 소양을 넓혀 키우고, 과문작성을 집중하였다. 일반적인 교양의 습득과 학문연구도 중요하지만 과거공부에서는 시험의 경향에 맞추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맞춤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누구나 문과급제를 꿈꾸지만, 급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등장을 올리는 대표자'가 되어 직접 '민장'을 올려보고 그에 대한 관의 대응과 결과를 예측

1) 민장작성 남양부에 사는 최효순인데, 저희 형제를 대표하여 삼가 이렇게 소를 올립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남양 서면 송림골에서 살아온 집안이고, 저는 송림골에서 서당을 설립하여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는 훈장입니다. 우리는 남양부 서면 무봉산 남사곡을 무주지라 알고 있었기에 30년 전 조상의 분묘를 조성하였는데, 수년 전부터 분묘지에 알 수 없는 불이 나고 봉분의 풀들이 수시로 고사하는가 하면 짐승 등의 분묘 훼손으로 보이는 사건이 반복 발생하였기에 형제들이 숙의하여 약 120보 우측으로 옮겨 이장해서 무탈하게 지내오고 있었는데, 지난해 들어 조상님들의 분묘지를 포함한 해당 산지를 본래의 산주 홍성원에게서 송근술이 매수하여 자신의 부모 묘를 조성했다고 하면서, 우리의 무덤을 파서 옮기라고 합니다. 하여..

향교와 서원(남양향교, 안곡서원을 다녀와서)

Ⅰ. 서론 향교와 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교 건축으로,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향교는 고려때 세워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들어 고을마다 설치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서원은 16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학 교육기관으로서 특별한 인물을 배향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향리의 미풍양속을 순화하는 교화 기능과 인재를 키우는 교육 기능을 가진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상징이자 전승의 중심지였으며,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전통시대의 교육을 담당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현재 화성시에는 남양향교와 안곡서원이 남아있다. 집에서 남양향교까지는 자동차로 25분 정도, 다시 그곳에서 안곡서원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었다. 남양향교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 관리자님께 전화를 하여 방문예약을 하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날은 관리자님께서 안 계시..

조선시대 객사의 주요 기능 2가지와 공간구성의 특징

조선시대 객사의 주요 기능 2가지와 공간구성의 특징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객사의 신축이 활발히 늘어났다. 객사의 기능을 보면 빈객의 접대와 정치를 베푸는 시설로서의 사용되었고, 이 외에도 유교적 의례를 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방관 혹은 사신이 국왕에 대해 예를 올려야 할 때, 즉 국왕이 임명하여 보낸 관찰사를 맞이하거나, 국왕의 명령서인 논서를 받아들이는 의례 등 국왕에 대한 모든 의례가 객사의 정청에서 행하여 졌다. 읍치에 군현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거처인 공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아가 아닌 또 다른 권위적인 공간인 객사를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방통치가 지방관이 아닌 국왕에 의해 직접 이루어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