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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마하리 고분군

seoyeoul 2024. 1. 14. 10:19

이 글은 주현동의 논문 <화성 마하리 고분군의 축조양상과 의의>와 임영동의 논문 <백제 한성기 묘제의 다양성과 그 의미>를 정리 편집한 것입니다

 

 

마하리 고분군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북쪽에 자리한 태봉산(223m)과 남쪽의 상방산(154m)을 잇는 능선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가지 능선의 구릉에 자리한다

 

화성 마하리 고분군은 1995년 경부고속철도 경기도 구간에 대한 개발에 앞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곳은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65기의 백제 한성기 고분이 조사되었고, 이후 2018년도에 화성 마하리 고분군 현상변경허가구역 내에서 백제 한성기 석곽묘 47기와 횡혈식 석실분 6기가 조사되면서 주목받았다..

마하리 고분군은 단순토광묘수혈식 석곽묘횡혈식 석실분으로 묘제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 한성기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다수의 수량이 확인되고 있어 석곽묘와 석실분이 지방으로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이전의 모습이 관찰된다.

 

마하리 고분군은 4세기를 중심으로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며, 동사면의 석곽묘에서는 후기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완과 과대 등이 출토되어 78세기까지 석곽묘의 축조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하리 고분군에서 확인된 토광묘는 석곽묘에 비해 수량이 적은 편이다. 고분의 중복관계와 제반 층위적 상황을 고려할 때 토광묘는 마하리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던 묘제로 판단된다. 하지만 출토유물 중에 기형과 속성이 석곽묘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견되는 것들도 존재하고 있어 일부는 석곽묘와 함께 계속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광묘는 해발 7075m에 해당하는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며, 주구가 부가되지 않은 단순 토광묘로 충전토와 함몰토층으로 보아 토광묘의 매장주체부는 목관을 사용하였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200395, 너비 100240이며, 장폭비는 1.5:12.3:1으로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나타난다.

출토유물은 단경호·원저소호·직구단경호·장란형토기·심발·도자·철촉·철부·철모·철겸·교구·유리구슬 등이 확인되었다.

 

석곽묘는 수혈식 석곽묘로 토광묘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입지 하며,, 일부 선축된 유구를 파괴하고 축조된 경우도 확인된다.

석곽묘는 능선의 정상부(해발 100m)와 동사면과 서사면 해발 80m까지 횡혈식 석실분과 혼재하여 분포하는데, 크기는 길이 210476, 너비 120296이며, 면적은 510정도이다.

이곳의 석곽묘는 토광 바닥에 횡가목으로 받쳐진 목관이 안치되고 난 다음에 목관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석곽을 쌓아 가면서 일부 돌은 길게 돌출시켜 목관이 움직이지 않도록 지탱하였으며 상부로 올라가면서 벽을 내경 시킴으로써 목관의 폭보다 천정부의 폭이 더 좁아지게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단경호(구형호·난형호)·광구호·직구단경호·직구소호·심발형토기·병·장란형토기·철도자·재갈·철겸·철착·관정 등이 출토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은 고속철도 노선의 동쪽 남사면 해발 75m지점, 선상부(해발 95∼100m)지점, 서사면(해발 8590m)에 나란하게 자리한다.

묘실의 면적은 중형이 다수이며, 소형과 대형의 석실분도 관찰되나 면적 8.011.0정도의 규모로 편차가 크지 않다.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횡혈식 석실분에서는 단경호(구형호·난형호)·광구호·직구호구연부편·직구소호·심발형토기·병·장란형토기·환두대도·철도자·재갈·철겸·철착·꺾쇠·관정 등이 출토되었다.

 

마하리 고분군은 백제 중앙세력이 발안천 유역을 장악하면서 조영 된 것으로 생각된다. 마하리 고분군이 위치하는 봉담지역은 마하리 고분군 외에도 왕림리, 당하리유적 등 다수의 백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정치체로 태봉산 서편 백제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 유적군 중에는 마한시기의 유적부터 백제시기로 확인되는 유적까지 3세기5세기의 유적들이 확인된다. 다양한 시기의 유적이 소재하는 점을 감안할 때, 백제, 중앙 세력이 진출하기 이전부터 화성 봉담지역은 재지세력의 활동이 유지되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마하리 고분군 내에서도 주거지와 원형수혈 등의 생활유적이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어 고분군이 축조되기 이전에 재지세력의 모습이 관찰된다.

마하리 고분군 내에서 확인되는 주거지는 고분이 축조되면서 태봉산 구릉 아래로 이동된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조영 된 마하리 고분군은 석축묘가 중심이 되는 고분군으로 조영 되었다.. 원삼국단계의 선행 분묘군(주구가 부가된 토광묘 등)이 없이 단순토광묘에서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으로 전환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만 현재 마하리 고분군의 전체적인 규모가 파악되지 않아 추후에 선행분묘군이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마하리 북쪽의 태봉산에서 서사면을 따라 남쪽의 상방산까지 고분군의 범위로 확인되었고, 이는 서봉지맥의 서쪽으로 백제의 중앙 세력이 진출한 것과 일치한다.

발안천 마을유적이 서봉지맥의 서쪽의 발안천 하류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마하리 고분군의 축조집단과 발안리 마을유적의 재편세력도 발안천 유역을 통한 긴밀한 관계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백제의 중앙세력은 발안리 마을유적을 거점으로 삼아 발안천유역 일대를 중심으로 화성 일대를 장악함과 동시에 석축묘의 전파가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