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즉시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일반명령 1호를 통해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분할 점령하도록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점령 지역과 독일에 협력했던 국가들을 처리하는 원칙을 만들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를 가질 때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 시켰는데,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것이 곧 ‘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었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는 크게 4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 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둘째,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의제는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 영, 소, 중의 4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供)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셋째,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독립 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4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넷째, 남북 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 사령부 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3상회의 결정의 핵심 목적은 해방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의 대표가 협의한다는 것과 함께 가능한 짧은 기간의 신탁통치 실시 이후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조선인들의 대표로 구성된 조직을 만들어 한반도 외에 다른 지역에 더 많은 힘을 집중해야 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3상회의 결정이 미소 양국이 한국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공식 결정이 발표되기 전인 1945년 12월 27일 1면 머리기사로 <外相會議에 論議 朝鮮獨立問題 / 蘇聯은 信託統治 主張 / 蘇聯의 口實은 38線 分割占領 / 米國은 卽時獨立 主張>을 실었다. ‘워싱턴 25일發 合同至急報’라고 돼 있는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이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미국이 제의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의한 것이라고 왜곡하였다.
동아일보는 12월 29일자 2면에 <외상회의 결정문>을 2단 크기로 실었다. 그러나 1면 기사는 <신탁통치제 과연실시 / 외신이 전하는 모스크바회의 내용 / 4국통치위원회 금후5개년 계속>이라는 제목에 “조선에 미, 소, 영, 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 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관측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附)한다. 미, 소는 남북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양지역 군정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사실과 다른 왜곡 보도로 임시민주정부 설립 내용은 빼고 신탁통치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35년간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한국 사람들에게 신탁통치는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로 인식되었고, 한국의 모든 정치 세력들은 곧 신탁통치 반대(반탁)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1945년 11월과 12월에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세력은 반탁의 선두에 섰으며, 보수 세력들을 결집하기 위해 미군정의 도움으로 귀국했던 이승만과 한민당도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결정 발표 후 열흘이 지나면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3상회의 결정이 한국에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며, 한국에 들어와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고있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협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1월 초에는 좌익이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보수 우익과 좌익을 대표하는 정당 대표가 만나 정치적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이틀도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정치적으로 좌파와의 합의를 꺼렸던 임정과 이승만은 보수 우익과 좌파 사이의 연합보다는 자기들만의 권력을 원하였다. 조선공산당도 연합보다는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고자 했기 때문에 보수 우익과의 협의를 반대하였다. 보수 우익과 좌파 사이의 대립은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으로 나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그 대립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었고, 미국과 소련 중 누구를 지지하는지 여부였다. 왜냐하면 보수는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했지만, 그 반대 진영은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3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반탁운동 세력에 대한 입장 차이로 휴회되었다. 이에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적인 정치인들은 미군정 지원하에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여운형 암살사건 이후에 별다른 성과없이 막을 내리고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다. 유엔은 한국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위 해 ‘유엔한국임시워원단’을 파견하였으나 38선 이북지역 방문은 소련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쪽의 정당 사회단체의 지도자들만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이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각기 수립되었다.
<참고문헌>
1. 김동민(2010),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p135-153)
2. 이완범(1995), <기획1:한국 현대사-왜곡과 진실 모스크바 3상회의>, 역사비평(p333-340)
3. 송찬섭 外,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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