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장작성
남양부에 사는 최효순인데, 저희 형제를 대표하여 삼가 이렇게 소를 올립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남양 서면 송림골에서 살아온 집안이고, 저는 송림골에서 서당을 설립하여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는 훈장입니다.
우리는 남양부 서면 무봉산 남사곡을 무주지라 알고 있었기에 30년 전 조상의 분묘를 조성하였는데, 수년 전부터 분묘지에 알 수 없는 불이 나고 봉분의 풀들이 수시로 고사하는가 하면 짐승 등의 분묘 훼손으로 보이는 사건이 반복 발생하였기에 형제들이 숙의하여 약 120보 우측으로 옮겨 이장해서 무탈하게 지내오고 있었는데, 지난해 들어 조상님들의 분묘지를 포함한 해당 산지를 본래의 산주 홍성원에게서 송근술이 매수하여 자신의 부모 묘를 조성했다고 하면서, 우리의 무덤을 파서 옮기라고 합니다.
하여 각방으로 수소문하여 본 결과. 본래의 산주(山主)라는 홍성원은 인근 고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가문의 일원이었는데 지금은 한양에서 거주하는 사간원의 관리라고 합니다. 송근술의 말로는 일년 전에 홍성원으로부터 매수하였다는 그들이 주장하는 산지는 우리 산소의 동편으로 500~600보 떨어져 있으며 ‘좌립구불견(坐立構不見)’의 장소입니다. 우리 집안 분묘와 홍성원의 분산(墳山)사이에는 여러 오래된 무덤들이 쌓여있으며, 제가 분묘를 조성할 때 홍성원이 금장(禁葬)한 바도 없습니다. 즉, 우리 집안에서 분묘를 쓸 때 홍성원이 한마디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분묘가 홍성원 분산의 토지를 빌려 장례를 치른 것이라면 처음 분묘를 조성한 후 이장할 때에는 원 분묘 기지를 홍성원에게 반납하였을 것입니다. 자식이 어버이 장례를 치르는 일은 인륜지대사인데, 산주가 있다면 그에게 허락을 안 받았겠습니까? 또한, 그 분묘지가 홍성원의 땅이었다면 30여년간 아무런 이의통지 없이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인 저는 그렇게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예측하여 보기에는 홍성원으로부터 송근술에게 매매되었다는 문건은 우리 집안의 분묘지를 차지하기 위한 허위작성한 매매문서가 확실한 듯 합니다. 재판장님께서는 송근술과 홍성원 간의 매매문서와 그들을 불러들여 본 송사(訟事)를 명약관화하게 판별하여주어 얼토당토 않은 이 억울함을 밝혀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안전주께서는 바른 처분을 해 주시기를 천만 번 바라옵니다.
남양부사께 올림
1710년 6월 15일
2)관의 대응과 결과
남양부사는 직접 현장에 가 보았다. 가서 보니 최효순의 구 분묘와 송근술의 분묘는 12보 5척 5촌이고, 최효순의 신 분묘와 송근술의 분묘는 35보 3척 1촌이다. 거리상으로는 가까웠다. 최효순은 30년 전 분묘를 설치한 뒤 1708년 4월에 이장하였는데, 이장 이후 구 분묘는 즉시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설치한 분묘 주변의 큰 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묘목을 심고 잘 가꾸려 하는 것이 보였다.
산에는 산주(山主)와 산객(山客)을 구분할 수 있다. 이 땅이 원래 홍성원의 소유라면 어떻게 최효순에게 아무 말도 없이 빌려주었겠으며 이장토록 하게 하였겠는가? 이는 이치에 어긋난다. 만약 해당 산지가 원래 홍성원의 소유라고 할지라도 문기를 보면 해당 산의 남북쪽 산등성이를 매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효순의 분묘는 남쪽에서 언덕 하나 건너에 위치하였으므로 소유에 포함될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홍성원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이미 30년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홍성원이 최효순에게 환급받을 수 없다.
홍성원의 증조부로부터 홍성원이 상속받아 가지고 있던 땅을 송근술이 샀다고 하나 증거인 매매문서에는 년도가 잘못되어 있어 위조의 흔적이 명백하다.
또한, 송근술은 산지 원주 홍성원과의 매수매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상황의 질문에도 명료한 답변을 내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문서를 위조하였음이 드러났음으로 필히 징계하여야 할 터이다.
그러므로 최효순은 해당 분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
한데, 산지의 원주인 홍성원은 일가가 서울에서 거주하고 홍성원은 현재 동지사(冬至使) 연행(練行) 수행 중으로 명년 5월 환국하였을 때 송근술과의 산지 매매에 관련하여 상세한 과정을 추후 확인하겠다.
<참고도서>
1.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송찬섭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2. 조선시대 결송입안(決訟立案)연구, 권이선 석사학위 논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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