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부친과 숙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려움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즈음 들어 천자문을 통해 글자를 익히고, 소학, 효경 등 사서삼경을 익히기 시작하였고, 문장 짓는 법을 학습하였다.
열 다섯 살 무렵 집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절에 들어가 경서를 읽고 문장 가다듬기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과거준비를 위해 향리에서 운영하는 거접들의 무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과거 입시를 위해 경서, 성리서, 역사서 등을 탐독하여 소양을 넓혀 키우고, 과문작성을 집중하였다. 일반적인 교양의 습득과 학문연구도 중요하지만 과거공부에서는 시험의 경향에 맞추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맞춤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누구나 문과급제를 꿈꾸지만, 급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열심히 도전은 하는데 결과는 영 시원치 않았다. 스무살 즈음부터 꾸준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다가 스물여덟 살에 겨우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첫 번째 시험을 본 후 쌍부현의 뼈대 가문 밀양박씨댁 정혼녀와 결혼했는데, 과거 공부를 하느라 일년에도 몇 달씩 집을 비워야 해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꾸리는 것은 오롯이 아내와 가솔들에게 맡겨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늦게라도 합격 소식을 전해 미안한 마음을 덜어낼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다음시험에 대한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하여 나름 더욱 정진하였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다시 문과 시험에 응시하여 두어번 낙방을 거듭하다가 나이 서른넷에 문과 방중에 급제하여 한시름 놓게 되었다
합격자가 발표되고 국가에서 합격증서를 나누어주는 공식행사인 방방이 열리는데, 이때 국왕께서 꽃과 술, 음식을 하사하셨다. 다음날은 문무과 급제자들이 함께 궁궐에 나아가 국왕에게 인사하는 사은을 행하고, 그 다음날에는 성균관에 나아가 문묘를 배알하는 알성례를 행하였다.
드디어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에 배치되어 수습기간을 거치게 되었다. 출근 첫날부터 선배들의 집을 방문하여 명함을 드리고 인사를 올리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농으로 귀신 옷이라고 칭하는 헤진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배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명함을 드리려고 하는데, 선배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다. 낮에는 출근을 하기는 하지만 제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멀뚱히 있다가 선배들이 던지는 장난과 희롱에 멋쩍게 응대해야 하였다.
스무여 일을 눈치보며 간신히 인사를 마치고 동료들에게 연통하고 비축했던 은전을 모두 모아 날을 잡아 연회를 열고 선배들을 위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접대하였고, 또 면신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 축과 첩으로 만들고 고향에서 올려 보내준 소주단지 십여동이를 가가마다 선물하였다. 이 면신례를 위하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러 날 동안 많은 고통이 있었다. 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문 영광을 위한 일신의 고통 의례라고 생각하면 일면 은근한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그려보며 잠을 청하였고 과거 준비 20여 년을 회상하였다.
합격 축하의식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창부, 재인, 무동 등을 대동하고 풍악을 울리며 귀향길에 올랐는데 언제 소문이 났는지 이웃 고을을 들어서부터 선비들이며 과거동이들이 마주칠 때마다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고향에 도착했더니 일가친척과 고을 동리 사람들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축하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과거급제는 내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가문과 고을의 영광이라는 격려는 새삼 초임관리의 길을 나서는 다짐을 갖게 하였다.
이어서 가묘, 종문 어른들을 찾아뵙고 향교, 서원을 배알하면서 짬짬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상님의 묘소를 찾아 잔을 올리는 영분제도 하였다. 우리 집안뿐만 아니라 처가의 조상분묘를 돌아보고 친지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몸이 축나도록 바쁜 십여일을 돌아나니 다소 여유가 들어 기다려주고 말없이 후원을 해준 내자와 어린아이들과 손을 잡고 잠시 동문들과의 여유가 아쉬워질 무렵 가노(家奴) 덕이를 동행하여 상경을 했다.
승문원에서 수습기간을 보내고 승정원 주서가 되었는데, 사은을 한 다음 날부터 10일동안 근무를 하고 이틀을 쉰 뒤 며칠 연속 근무하고, 다시 이틀을 쉬는 일정이 연속되었다. 근무하는 날에는 숙직도 겸하여서 하였다. 5일 동안 밤낮으로 근무하고 이틀을 쉬는 것이 정식이었으나, 동료가 병으로 출근을 하지 못하면 대신 근무를 서는 날도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은 국왕에게 올라가는 문서의 사본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피로에 절어서 지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도 급여는 쥐꼬리였다. 매달 쌀 열두 말과 콩 다섯 되를 받았는데 이것으로는 나와 하인 덕이의 하숙비 정도밖에 안되어서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토지와 가솔들의 노력에 의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관원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입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수습 초임의 관리가 얻을 수 있는 급여 수입은 보잘 것 없기에 궁핍을 털어내기 위한 별도의 수단은 고향에서 수시로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 귀양, 인목대비 폐위 그리고 남인 세력의 제거 등 당시 정국이 돌아가는 행태가 심상치 않았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치열함이 매우 비정한 인간사를 보여주기에 내가 겪는 선비로서의 청렴과 맑은 이상을 펼친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비탄에 빠지게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북인 동료가 부리는 위세는 때때로 나를 못 견디게 하였다. 육체적으로 과다한 업무가 고달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낙향을 하고 말았다.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북인 정권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양에서도 그들의 힘을 뒤에 업고 향교와 서원을 장악하여 사람들을 위협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위협에서 향교와 서원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그들 북인의 천하도 인조반정으로 인해 일단락을 내렸다. 귀양 갔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폐모론에 반대해서 조정을 떠났던 이들도 속속 돌아왔다. 반면 북인정권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유배길에 오르거나 처형을 당하였다.
내가 있던 남양에서도 북인으로 활동하거나 그들을 등에 업고 전횡을 부린 인사들의 단죄가 시작되었다. 유생들은 유회를 열어 사림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했다.
인조반정이후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으며, 후에 청으로 이름을 바꿔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향교에 모여 의병조직을 결의하고, 명망 있는 인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향리의 여력을 모으고, 가급적 전면에 나서지 않는 선에서 의병부대를 조직을 후원하고는 군량을 내고 노비를 보내 의병에 참여케 했다. 한때 국록을 먹던 관리였고, 촌벽에 은거한 시골 사림으로 국가를 구하는데 망설임 없이 나서야 함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라의 혼란이 다소 진정되어갈 즈음 나에게 다시 관료의 꿈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 조정에서 다시 부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고향에 남아 유생의 삶을 살기로 하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생은 의미가 특별하였다. 향교와 서원을 지키고 제사를 봉행하며, 유학을 수호하고 그 이념을 실천하는 것도 유생의 일이었다. 나는 고을 내에서 향안을 만들어 고을 운영에 참여하였고, 고을의 기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약과 조직인 향약을 정비하는데 참여하였다. 향약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한편 고을에 현안이 있을 때마다 향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향회를 통한 공론을 고을 운영에 반영하였다.
요즈음에는 인근 고을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많아져 울 밖에 ‘교유당’이란 누각을 마련하고 찾아오는 선비 묵객들과 교류하며 시부(詩賦)를 짓는 날이 많아졌다. 때때로 서원과 향교에 나아가 후학을 위해 강론을 펴는 토론을 하고, 지방 사림들과 나라 걱정의 교제도 하면서 때때로 호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참고도서>
1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송찬섭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2. 조선 양반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글항아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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