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향교와 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교 건축으로,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향교는 고려때 세워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들어 고을마다 설치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서원은 16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학 교육기관으로서 특별한 인물을 배향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향리의 미풍양속을 순화하는 교화 기능과 인재를 키우는 교육 기능을 가진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상징이자 전승의 중심지였으며,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전통시대의 교육을 담당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현재 화성시에는 남양향교와 안곡서원이 남아있다.
집에서 남양향교까지는 자동차로 25분 정도, 다시 그곳에서 안곡서원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었다. 남양향교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 관리자님께 전화를 하여 방문예약을 하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날은 관리자님께서 안 계시는 날이라고 하셨다. 날짜를 다시 정하려고 하는데, 그분께서 향교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면서 형편되는 날 와서 문 열리는 곳은 다 살펴봐도 좋다고 허락을 해주셨다. 덕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었고, 줄자로 유물·유적의 거리까지 잴 수 있었다. 남양향교 관리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향교를 둘러보고 난 후 안곡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에는 안곡서원은 문이 잠겨있어서 둘러보기 힘든 곳이라고 하였는데, 다행히 내가 갔던 날은 문이 열려 있어서 안쪽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Ⅱ. 본론
남양향교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남양향교의 창건시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1481년(성종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남양향교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남양읍 남양리 역골이라는 곳에 설립되었으나, 그 후 1871년~1873년 사이에 현 위치인 남양리 글판이로 이건했다.
남양향교는 창건 이후 몇 차례 증·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명륜당은 1666년~1667년경 남양 현감 민시중이 향교를 수리하면서 창건했는데, 당시 명륜당 조성은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구체적으로 정착되는 조선 중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에 들어서는 1976년 대성전을 중심으로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멸실되었던 명륜당은 1989년 복구되었으며, 이후 크고 작은 보수를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양향교의 제향은 석전제·분향례·고유제가 있으며, 대성전에서 봉행된다. 석전제는 봄과 가을에 두 차례가 있는데, 춘계 석전제는 공자 기일인 5월 11일, 추계 석전제는 공자 탄신일인 9월 28일에 한다. 분향례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올린다. 고유제는 향교 구성원을 새로 임용하거나 시장이나 의회 의장이 새로 취임하는 경우, 그리고 위폐를 이안했다가 다시 봉안하는 것을 고할 때 행한다.
2. 남양향교의 구조
향교 건물은 대체로 단순하고 소박하며, 관청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읍내 가까이(5리 이내)에 설치되었다. 향교의 공간 구성은 제향과 강학의 공간으로 나뉜다. 이 구분은 단지 기능적인 면에서 구별일 뿐 아니라, 공간의 구도와 건물의 배치에서도 엄격히 드러난다. 제향 공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현인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말하는데, 일종의 성스러움과 엄격성을 자아내는 성역화된 공간으로 보편적으로 향교 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일종의 권위와 상징성을 드러낸다. 강학 공간은 학습이 이루어지는 명륜당과 학생들의 공부와 숙식이 이루어지는 동재, 서재로 구성되며 대개 제향 공간보다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다.
남양향교는 국사봉 오른쪽의 완만한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야산이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322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큰길에서 남양향교의 진입로 중간쯤에 홍살문이 있으며, 그 옆에 하마비가 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까지는 박석을 깔고 잔디를 심어놓았는데 그 길이는 23m이다.
계단을 올라 외삼문을 통과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보이고, 명륜당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외삼문에서 명륜당까지는 6.75m이고, 동재와 서재 사이는 22.35m이다. 명륜당의 서쪽 담장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150년 수령의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재와 서재는 툇마루가 있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다. 동재와 서재는 온돌방 2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은 후면 북쪽 처마 밑에 있다. 살림을 담당하는 교직사는 동재 동쪽에 있으며, 명륜당 동쪽 담장에 일각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거주하시는 분이 있는 듯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명륜당 뒤쪽의 계단을 오르면 제향 공간인 내삼문과 대성전이 있다. 내삼문을 통과하면 대성전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삼문에서 대성전까지는 8.1m이고, 대성전 동측 담장에도 보호수로 지정된 15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다. 대성전의 좌우 측면의 경사로 끝자락에는 자연석 배수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대성전과 서쪽 배수로 사이 마당에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인 망료위가 있다.
3. 안곡서원
안곡서원은 1666년(현종7년) 남양 현감으로 부임한 민시중이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던 박세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곳이다. 그 후 1668년 박세희의 큰형인 박세훈, 1679년 영의정을 지낸 홍섬을 차례로 추가 배향했다.
안곡서원은 1721년(경종1년) 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1729년(영조5년) 중첩서원 철폐 때 철액되었다. 이후 1740년 경기 유생 한덕봉 등이 사액 철거를 철회토록 상소하였고, 좌의정이던 김재로도 철회를 건의함으로써 복액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다시 훼철되어 서원 부근에 위폐를 묻었다. 이후 1976년 지역 유림과 문중의 뜻을 모아 중건하고, 세분의 위폐를 봉안하였다. 현재 사우 내부는 박세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박세훈과 홍섬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으며, <안곡서원중건기>와 <안곡서원중건상량문> 현판이 걸려 있다.
안곡서원은 복원 후 홍살문을 보수하고 화장실과 담장을 축조하였으며, 진입로, 배수로, 바닥, 석축 및 계단 등 주변 정비를 했다. 1986년 화성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4. 안곡서원의 구조
서원은 사적인 교육기관인 만큼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았으며, 향교와는 달리 대부분 읍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성을 닦기 위해 자연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거나 체득할 수 있도록 건축물의 구도를 세웠는데, 때로는 좋은 곳을 찾으려고 이미 세워진 절터를 허물고 짓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서원은 기본적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학 공간은 유생들이 강독하고 수양하던 곳으로 강당, 재사, 장판각, 장서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향 공간은 선현을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 신문과 사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서원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적합한 위치를 택하여 지었다. 건물은 문묘나 향교와 비슷하게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이나 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을 두어 구분하였다.
안곡서원은 제부로 지방도로 305번의 상암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지점에서 동쪽 산자락을 따라 조성된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길 끝자락에 홍살문이 있으며, 서원 출입은 홍살문과 건물의 축이 달라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앞에서 우측으로 꺽여서 들어가야 한다. 이런 모습은 2001년에 외삼문과 주차장을 신축하면서 홍살문을 이건했기 때문이다. 기역자로 꺽여진 형태로 길이를 재 봤더니 홍살문에서 외삼문까지 27.7m이다.
외삼문에서 강학 공간인 강당까지는 11.2m인데, 1.25의 높이의 기단 위에 강당의 정면이 사당 쪽 내삼문을 볼 수 있도록 건물이 지어져 있는데,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즉, 외삼문을 들어가면 강당이 보이는데, 정면이 아니고 후면이 보이는 방식으로 건물이 지어져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건물이 뒤돌아 앉은 것처럼 지어졌는지 모르겠다.
강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내삼문은 외삼문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곳을 통과하면 사당이 보인다. 강당에서 내삼문까지는 3.4m이고, 계단을 올라 3.45m를 가면 제향 공간인 정면 3칸, 측면 2.5칸인 사당이 있다. 서원의 사면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담장 앞쪽에는 자연석 배수로를 만들어 물 빠짐이 원활하게 했다.
남양향교에서 건물을 줄자로 재었을 때 한 칸의 길이가 2.2m이던데, 안곡서원은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 강당은 한 칸이 2m이고, 사당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한 칸이 2.2m이었다.
남양향교에는 향교 안에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안곡서원 내부에는 나무가 없었다. 하지만, 외삼문 옆 담장 앞에 수령이 오래되지 않은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고, 홍살문 바깥쪽 동네 입구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50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다.
서원의 북쪽 야산에는 상주 박씨의 묘역이 잘 조성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박세훈의 묘도 있었고, 어떤 묘비에는 후손에게 당부하는 글도 적혀 있었다.
Ⅲ. 결론
내가 방문한 남양향교나 안곡서원 두 곳 모두 기대했던 것보다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잘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건물은 사용해야 잘 유지가 된다. 문화재 활용이 문화재를 보존하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올 5월에 화성시 남양읍 주민자치센터에서 청소년과 가족들이 다양한 체험․놀이활동 참여를 통해 향교의 역사와 의미를 배우고 지역 정체성을 다짐과 동시에 공동체 회복을 목적으로 ‘역사학교 – 남양향교에서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지역의 역사를 알고 내 뿌리를 아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에서는 2014년부터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을 하고 있다.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은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이 최대의 보존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면서 인문 정신 문화재의 본래 가치와 진정성을 계승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고자 한다.
2021년에는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 116건을 진행하였고, 내년에도 107건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성시에서도 관심을 갖고 문화재청 사업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향교와 서원을 적극 활용하는 교육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던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콘텐츠화하여 향교와 서원이 역사 교육의 장소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
참고도서 및 사이트
1. 한국문화와 유물유적(2021), 송찬섭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 화성시사 2-문화유산(2020), 화성시사편찬위원회
3.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80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https://blog.naver.com/chagov/222506336917 문화재청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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