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 세계 >
서양의 문명은 고대 오리엔트의 문명의 영향과 자극 하에서 기원전 3,000년경 지중해 유역에서 발생했고, 서양문명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있는 고전 고대의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800년경에 성립된 폴리스, 곧 도시국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폴리스 수립 이전에도 지중해와 에게해 유역에서 그리스 문명의 선주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에게문명이 발달했으나, 이 문명은 기원전 15세기 북쪽에서 이주해 온 인도 유럽어족의 미케네 인들에 의하여 멸망했다. 미케네인들은 기존의 청동기 문명과 자신의 전사적 성격을 융합한 웅장한 성체를 구축하고 여러 왕국을 세웠으나, 기원전 1,100년경 북쪽에서 남하한 도리아인들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무질서 상태를 야기했다.
폴리스는 미케네문명이 파괴된 후 무질서 상태에서 안전을 위하여 수립된 전사공동체 국가이다.
폴리스는 부족연합의 성격을 띠는 집주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혈연 및 지연으로 맺어진 구성원들은 공동체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정치적 관심이 높은 자유 시민임을 자부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안정된 폴리스체제는 그리스본토를 넘어서 에게해의 여러 섬과 소아시아 등 지중해 각지로 진출해서 폴리스체제가 확산되고, 지중해 세계의 교역이 촉진되었다. 이런 식민운동은 부유한 농민과 상공업자를 출현시키는 등의 사회변화를 나타냈다. 사회변화는 군사·정치변화로 이어졌으며, 평민들의 정치참여 기회의 확대. 곧 민주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폴리스 중 정복자 도리아인들이 세운 스파르타는 귀족정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이다. 피정복민 노예인 헤일로타이와 주변인인 페리오이코이 위에 스파르타 시민이 군림하는 구조였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귀족정인 성격이 강했으나, 스파르타 시민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민주정이기도 했다.
반면 아테네는 침입자인 도리아인에 대한 자기방어의 필요에서 자발적으로 수립된 공동체로서 가장 전형적인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상공업을 발달시켰으나, 심한 빈부의 차로 인해 부채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정자 솔론은 금권정치를 실시하여 부채노예를 금하고, 시민을 재산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눠 정치참여에 차등을 두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귀족과 평민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이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빈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참주정을 수립했다. 그는 토지분배, 상공업 장려, 대규모 토목공사와 공공제전 등을 통해 민주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그의 사후 참주정은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 후 평민파 귀족인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민주적인 행정개혁을 단행했다. 혈연부족이 해체되고, 데모스를 기반으로 한 행정 부족이 구성되고, 아테네의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가 최종의결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는 공식적 관료집단의 결여와 유력자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외국인과 노예, 여성들을 제외한 성인 남성들에게만 정치적인 권리를 부여하여, 그 참여의 폭이 극히 제한된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상호 경쟁하는 체제였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협동의 묘를 발휘하기도 했다. 오리엔트를 통일한 후 지중해세계로 진출한 페르시아제국의 침입을 단합해서 막아냈다. 해군력이 강력했던 아테네는 종전 후 그리스 사회의 패권을 쥐고 델로스동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를 기반으로 내부적인 민주화와 복지를 꾀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아테네의 독주에 맞선 스파르타와 대립은 폴리스들 사이의 내분으로 이어져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초래하게 되고, 소모적인 전쟁 끝에 쇠퇴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에 라틴족이 세운 조그마한 폴리스로 출발하여 기원전 3세기 초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그 후 포에니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서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기원전 1세기 말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참여권은 대지주 귀족들, 곧 원로원에 의해 독점되었지만, 2세기에 걸친 평민들의 신분투쟁을 통하여 3세기 초엽까지 형식상 귀족들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부유한 상층부의 평민들만 신분 상승이 되었을 뿐, 여타 평민의 처지는 나아진 바가 없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로마의 군대는 유력자들의 사병집단이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군인 정치가들은 빈민의 저지를 받아 권력투쟁을 벌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정을 수립했다.
옥타비아누스 이래로 200여 년간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긴 했으나, 빈부격차와 도시 빈민의 존재, 노예노동 등의 사회적 모순은 지속되었다. 로마는 기원후 2세기경 행정력이 약화되어 정권 다툼을 벌였는데,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군인황제의 시대에는 혼란과 쇠퇴가 극에 달했다. 경제쇠퇴는 도시의 위축으로 이어졌고, 재정 궁핍과 농민폭동, 내란과 게르만족의 침입 등 위기는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3세기 말엽과 4세기 초엽,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여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없이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그 후 기독교를 국교로 확립한 테오도시우스황제때 로마는 서로마와 비잔틴제국으로 분리되고, 이후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은 몰락하였다.
민주주의란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아테네는 왕과 몇몇 귀족에 의해 움직였던 곳이,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치를 하였던 곳이다. 그래서 민주정치의 기원은 고대 아테네라고 한다.
물론 지금의 관점의 민주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시대에 일반 시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외국인과 노예, 그리고 여성들을 제외한 성인 남성에게만 권리를 부여하여 그 참여의 폭이 극히 제한된 폐쇄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워서 상식으로 알고 있던 ‘민주정치의 기원인 아테네’에서 한 발 더 나가 ‘아테네 민주정의 한계’까지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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