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쇠퇴과정
근대의 중국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갔는데, 자기중심적이고 자급 자족적인 청조와 무력을 통해서라도 시장을 개방시키려는 서구 자본주의 세계와의 충돌은 영국의 아편 무역으로 촉발되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무역확대를 위하여 아편이라는 수출대체품을 찾게 되고 이로 인해 아편 흡식 풍조는 중국의 모든 계층으로 퍼져 나가 부패, 전투능력상실, 국가 기강 해이, 농촌 경제 파탄과 재정 타격 같은 어려움에 처했다.
이에 아편엄근론을 주장한 임칙서가 광등에 내려와, 외국인 상관을 봉쇄하는 등 중국에서 국법에 어긋난 밀수로 이어졌던 아편 무역에 압박을 가하자 영국 정부는 1839년 10월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소위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제1차 중·영 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중국은 아편과 부패로 전투능력을 상실 한데다 낙후된 무기로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난징조약이라는 최초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함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의 요구에 굴복했다.
애로호사건으로 불리는 제2차 중·영 전쟁은 1856년 10월 중국인 승무원을 해적혐의로 연행하고 불법적인 포교활동을 해온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서 발발했다. 수출 부진을 고민하던 영국은 조약개정을 요구했으나 청이 이에 불응하자 애로호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에 의해 청의 수도 베이징까지 점령되고 1860년에 이르러 베이징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이후 중국은 1874년 타이완 사건과 1884년 발발한 청·불 전쟁, 1894년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중화제국 질서의 변방에 있던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였다.
중화제국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 위기의식에 직면한 민중은 청조를 타도하고 신정국가인 태평천국을 세우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유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적 결사를 조직했는데, 처음에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치중하던 이 결사는 광시성에서 청조를 타도하자는 반란의 기치를 들고 난징을 점령해 수도로 삼고 독자적인 정권체제를 갖추어 세력을 확대해 나갔었으나 결국 태평천국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반란이 진압된 후 북부 중국에서는 반 기독교운동에서 출발한 반 외세투쟁이 일어났다. 중·영 전쟁으로 포교의 자유와 토지조매권을 얻은 교회가 교민을 늘리고 영향력을 키워 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 투쟁이 종종 일어나던 중 절정에 이른 것이 산둥성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투쟁이었다. 의화단은 구성원이 가난한 농민, 실업자, 도시 빈민 등 다양했는데, 청조를 지지해 서양세력을 타도한다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도 내세웠으나 열강의 파견군과 청조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한편 지배층은 1860년대부터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개혁을 시도했다. 최초의 개혁 시도는 서구문물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이었으나 청·일 전쟁에 패배하면서 파탄이 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신식학교 개설과 상공업 진흥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킹유웨이 등이 주장한 변법운동이 뒤를 이었으나, 이것도 서태후의 견제로 실패로 돌아갔다. 변법은 이렇게 좌절되었으나, 의화단 사건을 겪은 후 서태후가 신정 개혁을 선포하면서 행정, 군제, 재정, 교육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서구식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지배층에 의한 모든 개혁 시도 또한 혁명으로 청조가 물러나게 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1894년 쑨원이 하와이에서 홍중회를 세우면서 일어난 혁명운동은 만주족 타도(민족), 전제 지배 타도(민권), 빈부격차 없는 사회혁명(민생)을 목표로 한 삼민주의를 내세웠다. 쑨원을 비롯한 혁명세력은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시도하였고 혁명적 정세를 계속 확장 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1년 후베이성의 우창에서 신군 중 일부가 무장폭동을 일으켜 성공하면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난징이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남방의 14개 성이 혁명에 가담하면서 혁명에 동조하는 성이 늘어났다.
혁명에 동조한 각 성은 <중화민국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난징에 두고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여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선포하였다. 혁명을 진압하려는 청조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그 후 위안스카이를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으로 수립된다.
2)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쇠퇴의 원인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대 중국무역을 하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중국에서 도자기·차·비단 등을 수입하고, 모직물·시계·완구류·보석·향료·진주 등을 중국에 수출했다. 차는 영국인이 많이 찾는 기호품이 되면서 막대한 양을 수입하기에 이르렀지만, 중국은 서구 자본주의 상품이 침투하기 어려운 여건이었기에 동인도 회사는 무역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이를 막기 위해 청조가 압박을 가하자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킨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와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 청조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기까지 계속되는 외압 속에서도 태평천국운동, 의화단 투쟁 등과 양무운동, 변법운동, 신정 개혁 등 근대화를 향한 자구(自救)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이런저런 개혁 노력이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의 끊임없는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은 반식민지 사회로 전락해갔다.
1911년 청조는 서구 열강에 차관을 빌려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철도 국유화를 발표하였는데 광둥·후난·후베이·쓰촨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철도 국유화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농촌에서는 봉기, 도시에서는 파업이 일어났다.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운동에 청 조정이 강경하게 대응하자 점차 반청 운동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성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각 성의 대표들은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에서 모여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선포했는데,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2천여 년간 지속된 전제 정치를 종식시킨 것이다.
<참고도서 >
1. 박구병 外(2021),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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