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혁명의 전개과정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봉건적 신분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직자와 귀족은 각각 제1신분과 2신분으로 지배층이었고, 평민은 제3신분으로 피지배층이었는데, 제3신분에는 대부호부터 걸인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3신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각종 세금과 부역을 부담해야 했기에 농민들의 생활은 몹시 힘들었고, 삶이 팍팍했기에 불만이 많았다.
신분 간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무엇보다 구체제의 사회모순과 절대주의 왕정의 행정적 무능력이 초래한 프랑스 왕실의 재정위기는 혁명에 이르는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재정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왕실경비의 삭감을 통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제1,2신분과 제3신분의 표결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제3신분 대표들은 따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헌법제정을 맹세하며 테니스코트의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사회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하여 소집된 엘리트집단의 갈등과 분열 앞에서 민중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삼부회가 결렬되자 루이 16세는 외국인 용병 부대를 베르사유에 주둔시켰고, 시위 군중은 당시 절대 왕정에 의한 압제와 전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농민들의 시위는 폭동 수준으로 과격해졌고, 프랑스는 혼란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국민의회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농민들의 지지가 필요함을 절감했고, <봉건제 폐지 선언>을 통하여 시대착오적인 모든 봉건적 특권을 폐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이념을 제시하여 혁명의 주도권과 민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국왕은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계속 거부했고, 시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날로 더해갔다. 마침내 부녀자를 중심으로 ‘빵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시민들은 국왕 일가를 파리로 데려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새로운 프랑스 헌법을 제정하고 해산되었다.
왕권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던 루이 16세 일가가 잡혀 오면서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고, 입헌 군주제와 자유경제를 추구하는 푀양파와 왕정 폐지와 공화제 수립을 추구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대립했다.
입법 의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지롱드파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국에 대한 혁명전쟁을 시작하고 전쟁을 위한 의용군의 소집은 민중의 혁명 열기를 드높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공화제를 이룩하려는 혁명 위원회가 조직되고 왕궁은 습격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후 입법 의회가 해산되고, 1792년 9월 20일 공화주의자 중심의 국민 공회가 수립되었다.
새로 구성된 국민 공회에서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대립은 더욱 과격해졌는데, 자코뱅파는 반대 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지롱드파를 몰아내어 국민 공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처음 혁명을 시작할 때는 순수한 신념을 가지고 이끌어 갔지만, 반대편 세력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여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로베스피에르에 반감을 가진 국민 공회 의원들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른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 등장한 총재 정부는 혼란을 진정시킬 만큼 강력하지도 못했고, 혁명에 충실하지도 못했기에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는 물가폭등의 위기를 맞았다. 무엇보다 혁명에 실망한 시민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혼란을 막아주기를 원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혁명전쟁에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자코뱅파의 몰락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뛰어난 그의 군사적 능력 덕분에 곧 국민 공회의 요청을 받아 혁명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혁명군 지위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브뤼메르 18일’의 구테타로 무능한 총재 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한 뒤 종신 통령이 되었다. 그 후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황제에 올라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나폴레옹 1세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폈고, 법전을 통일해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으며, 개혁 정책을 시행해 위대한 프랑스 제국을 이룩했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높이 올라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 사회는 각종 특권을 누리는 성직자, 귀족의 지배층과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는 시민,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층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기에,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민주적인 법안이 마련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할 수 있겠지만, 공포정치와 내정 혼란으로 전쟁과 학살이 이루어지는 등 장기간 프랑스를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놓이게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내릴 수 있겠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밀어닥친 혁명의 거센 물결을 몸으로 부딪혀서 프랑스의 내일을 준비한 인물이다. 지중해 북부 프랑스령 코르시카섬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나 파리의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장교로 임관한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코르시카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코르시카의 독립운동 지도자 파올리에게 거부당하고 파리로 돌아와 자코뱅파에 가입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에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자코뱅파의 몰락과 함께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국민 공회가 그를 불렀고, 나폴레옹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혁명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804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완성했는데,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고 신앙의 자유를 가지며, 사유재산의 존중 등 프랑스혁명을 일부 계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계급과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대했기에 병사들도 충성과 용맹을 더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국민은 나폴레옹이 신분제를 없애고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할 것이라고 믿고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은 국민에게 약속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자신이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 나갔다.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기 위해 신분, 계급, 파벌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이었다. 귀족도 아니었던 그가 황제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시민과 국민군의 지지 덕분이었다. 누구나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면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 노력의 결과를 보상받는 사회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구체적 실현을 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발자취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참고도서 및 사이트>
1. 박구병 外(2021),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 염명훈(2006),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교원
3. 풍운의 혁명가이자 시대정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리더는 동기 부여와 가치 생산자이다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8/02/120878/, 매일경제
'네덜란드 생활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 동남아와 대륙 동남아의 가족과 종교가 각기 어떻게 다른지~ (0) | 2022.08.30 |
---|---|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경험이 결혼과 가족, 종교, 민족, 여가 등에 미친 영향 (0) | 2022.08.30 |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쇠퇴 과정과 원인 (0) | 2022.06.25 |
자전거같은 하나님 (0) | 2022.05.07 |
오늘 우음도에서 만난 꽃들 (0) | 2022.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