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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일컫는 호칭, 시대마다 다르다

seoyeoul 2015. 11. 18. 15:37

사도세자를 일컫는 호칭, 

시대마다 다르다


  사도세자는 조선 21대 왕 영조의 아들이자 22대 왕 정조를 낳은 생부이다. 그런데 많은 문헌자료에서 그를 일컫는 칭호가 다양하고, 종묘에 가면 안내판에 ‘장조(莊祖)’라고 표기되어 있다.


  영조와 정조, 고종대를 지나며 그를 존중하는 조처가 내려지면서 그에 대한 칭호가 변화하였는데, 그의 시호(諡號)와 무덤·사당의 명칭이 그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시호는 죽은 뒤 이름을 대신하여 부르는 명칭인데, 사도세자가 1762(영조 38) 윤 5월에 돌아가시자 당시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때부터 그를 ‘사도세자’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망한 아들을 생각하고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라는 뜻을 풀이하고 있지만, 시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던 방법)에 따르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思), 요절하다(悼)는 의미였다’ 이후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림으로써 ‘장헌세자’라 일컬었다.


  1762년 7월 사도세자를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장례를 치른 뒤 그의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상례가 끝날 무렵, 신주를 봉안할 사당을 조성하는 동안 영조나 신하들은 ‘사도묘’라고 일컫다가 1764년(영조 40) 5월에 영조가 ‘수은’이라는 사당 칭호를 내리면서 이후에는 ‘수은묘(垂恩廟)’라고 ’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776년 3월 정조가 그의 무덤을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으로 승격시켰고, 1789년(정조 13)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원호를 바꾸었다.


  사도세자는 ‘사도세자’, ‘수은묘(垂恩墓)’, ‘수은묘(垂恩廟)’ 등으로 불리다가 1776년 3월 이후부터는 ‘장헌세자’, ‘영우원’, ‘현륭원’, ‘경모궁’ 등으로 일컬어졌다.


  사실 정조는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고 싶었지만 추숭하지 않겠다고 할아버지인 영조와 약속하였기 때문에 정조대에는 국왕으로 추숭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조의 소원은 고종이 1897년 황제로 즉위한 뒤 1899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 졌는데, 1988년 (광무3) 10월(양력 11월)에 장헌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숭하고 종묘 정전 제 13실에 그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이로써 경모궁은 더 이상 장헌세자의 사당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현륭원도 왕릉으로 승사도묘은묘격되었고, 능호는 ‘융릉(隆陵)’으로 정해졌다. 한 달여 뒤 11월(양력 12월) 고종이 장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묘호는 ‘장조’, 제호는 ‘의황제’로 정해 올렸다. 묘호는 승하한 국왕의 신위를 종묘에 봉안할 때 일컫는 칭호이고, 제호는 황제의 칭호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죽는 비운을 겪었지만 황제로까지 추존되는 영예를 누렸다.


사도세자를 가리키는 명칭의 변화

연도

시호

묘, 원, 능호

묘호, 궁호

묘호

1762년(영조 38) 윤5월

사도




1762년(영조 38) 7월


수은묘(垂恩墓)


1764년(영조 40) 5월



사도묘, 수은묘(垂恩廟)


1776년(정조 즉위) 3월

장헌

영우원

경모궁


1789년(정조 13) 8월


현륭원



1899년(광무 3) 10월


융릉


장종

1899년(광무 3) 11월

의황제



장조


<왕의 행차(화성시 발행)>에서 정리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