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
당성은 해발 165.7m의 구봉산 정상부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당성이 위치한 구봉산 자락은 남양반도 중앙부에서 서남쪽의 바다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늘어서 있는데, 구봉산이란 산 이름도 이 길게 늘어선 산줄기의 봉우리가 9개 인데서 유래한다. 이 봉우리들중에서 가장 높은 곳은 염불산 봉수터가 있는 해발 170.2m의 봉화산이다.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이 곳에서는 서해안 일대의 풍광이 잘 관찰된다. 지금은 시화방조제와 각종 매립사업으로 육지처럼 변하거나 원래는 섬이었던 지역이 뭍으로 연결된 곳이 많지만 과거 해안선을 유추해보면 서해에 면한 크고 작은 섬들이 잘 조망되는 위치였기에 바다로부터 접근하는 적들과 각종 교역선들을 잘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성 주변에는 서북쪽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화량진성이 위치하고 동남쪽 4km 지점에는 청명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성은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쌓은 성벽은 구봉산의 정상부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을 따라 퇴뫼식으로 축조된 삼국시대 성벽이다. 둘레는 363m이며, 외벽 높이는 4-5m이고 성벽위에는 2-3.5m의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6-8세기대의 신라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두 번째 성벽은 이 성벽의 중간부를 관통하며, 구봉산 동북쪽 능선을 따라 가다가 동남방향의 산 복부를 감싸안은 장방형의 포곡식성벽이다. 얼마 전까지는 이 성벽이 내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퇴뫼식 산성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말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벽은 신라하대의 당성진 설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내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유물들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성벽의 둘레는 1,148m이며 판축기법을 이용한 토축성벽으로서, 일부 구간은 석심을 채워 쌓은 수법을 보이기도 한다. 외벽의 높이는 3-4.5m이다. 이 성에는 남문터와 북문터가 정상부 아래의 기슭에 있고, 동문터와 수구터는 계곡 쪽에 있다. 수구터의 안쪽에는 지금도 샘이 있어 물이 사철 나오고, 주변에 건물터가 있다. 서벽에 인접한 정상부에는 노목이 우거진 숲이 있는데, 여기에 성황당이 있었다.
이 외에도 동북쪽 능선과 서북쪽, 서남쪽 능선을 따라가며 작은 외성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서남쪽 외성에서는 남양장성이라 불리는 토루가 연결되고 있으나 쌓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 성은 한 시기에 여러 구조들을 복합적으로 만든 복합식 산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 볼 때 시대를 달리하여 쌓은 성으로 확인되었다.
당성 내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여러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석촉, 돌끌과 같은 석기 유물로 부터 시작해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기와와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와 백자 등 자기류,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백자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당성이 주목받는 지역이 된 이유는 당성의 독특한 지형과 해상교통로의 요지라는 지리적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성은 중국 산둥반도와 통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이고, 연안항로에서는 충청권과 경기만을 잇는 접경지대에 위치한 요충이었다.
신라에게 당성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5세기가지도 신라는 삼국 항쟁에서 제일 뒤쳐진 국가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시행해서 한성백제를 압박하던 시기에는 거의 고구려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했었다. 하지만 신라에게는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는데 바로 남한강 수로가 신라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고속도로나 철도가 연결된 셈인 것이다. 병력과 물자를 육로로 이송해야 하는 백제나 고구려는 수로를 이용하는 신라에 비해 5배 이상의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신라는 한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양쪽에서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신라는 곤경에 빠졌다.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당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으로 가는 두개의 뱃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요동반도의 여순, 대련까지 간 뒤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은 묘도군도를 따라 남하해서 산둥반도의 등주(봉래)로 들어가는 항로이고, 또 하나는 경기만에서 바로 서해를 횡단해서 산둥반도의 성산이나 청도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때 서해안의 출발지로 사용할 수 있는 항구는 한강 하구나 강화, 교동, 당성 등이었다. 하지만 한강하구나 강화, 교동은 구구려의 영역인 황해도 해안에서 감제되기 때문에 위험했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항구는 당성에서 출발해서 덕적도를 지나 산둥의 성산이나 청도항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었다.
신라가 당성을 이용해서 당나라와의 친교를 확대하자 백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당성을 빼앗김으로 해서 서해안을 따라 도는 연한항로가 끊어졌다. 한반도와 산둥반도를 잇는 직항로는 이용할 수야 있었겠지만 훨씬 어렵고 위험해 졌다. 당성은 충청도 해역에서 경기만으로 진입하는 해로상의 요충이기도 했는데, 한성 탈환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는 백제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할 수 없으면 바닷길이라도 이용해서 병력과 물자를 대량으로 수송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 해로역시 당성이 가로막고 있어서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설치된 염불산과 해운산에서는 남양만을 통과하는 해로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성 앞바다에는 제부도, 대부도, 영흥도와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지도에 이 섬들 사이로 통과하는 해로는 모두 1리 정도의 좁은 수로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마디로 방어에는 유리하고, 통과하기는 쉽지 않은 지역이 이 일대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에도 바로 이 당성 아래 화량포에 경기우도 수군기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삼국 간의 승부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물리치고 한성을 되찾기 위해, 당나라와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고있는 상황에서 신라와 당의 동맹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당성을 탈환해서 신라의 해양진출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의자왕은 고구려를 끌어들여 당성 탈환전을 시행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신라가 당성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적 이기도 했지만, 당선은 공략하기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였다.
오늘날 현지에서 보면 당성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산의 외형은 평범하고, 산성의 성벽은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전 당성의 지형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다.
당성은 하늘에서 보면 섬과 육지가 붙어 있는 듯한 형태의 지형이다. 삼면은 바다로 둘러 쌓이고, 육지와 연결된 곳은 갯벌이다. 밀물 때는 물이 들어와 완전한 섬이 되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이 갯벌이 메워지고, 마을과 경작지가 들어서 산 아래 펼쳐진 들판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자세히 보면 과거 물이 흘렀던 흔적과 지형을 볼 수 있다.
성에는 여러가지 방어시설이 있지만 최고의 방어시설은 해자인데, 물이 들어와 바닷물이 해자와 같이 감싸면 당성은 천혜의 요새가 된다. 당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면서도 동쪽은 육지와 갯 강으로 분리되어 있어 육지와도 가깝고 썰물 때면 육지와 소통도 원활하다. 당성은 섬의 방어력과 최고의 해자, 산성의 접근성을 모두 지닌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당성을 공격하려 하자 신라가 당나라에 호소해서 공격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신라의 기록은 당나라의 역할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백제가 당성 탈환에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당성이 보기 드문 요새였고, 신라가 전력을 다해 방어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당성과 대당교통로의 방어에 성공했고, 그것이 삼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3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3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산둥반도의 성산항을 출발했다. 당나라군은 곧바로 황해를 횡단해서 덕물도(덕적도)에서 법민(문무왕)이 거느린 신라군과 조우했다. 법민의 신라군은 당성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덕적도에서 양군이 만나야 했던 이유는 연안 항로를 항해하려면 현지인의 수로 안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덕적도에서 만난 나당연합군은 금강 하구로 상륙해서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는데, 이때 남동쪽으로 바로 내려갔을 수도 있고, 당성 앞까지 온 뒤에 아산만을 지나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을 수도 있다.
1350년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입은 최무선의 화기 발명과 대마도 정벌로 인해 겨우 수그러들었지만 그때까지 고려사회를 무던히 괴롭혔다. 왜구가 제일 좋아한 목표는 곡물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었는데 고려시대에 모든 조운선은 서해안을 따라 올라와 강화, 교동, 예성강을 거쳐 개경으로 들어갔다. 왜구는 이 사실을 알고 남양, 경기만으로 올라와 섬들 뒤에 매복해 있다가 조운선을 습격했다. 또 왜구들은 경기만에 펼쳐진 섬과 해안에 상륙해 마을을 약탈했는데, 남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운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기만 일대에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할 뿐 아니라 경계 시스템을 마련해야 했는데, 조선은 경기도의 수군을 우도와 좌도 수군부대로 나누었다. 우도 수군은 공격부대이고, 좌도 수군의 임무는 경계와 수비였는데, 좌도 수군의 본영을 바로 화량에 두었다.
화량은 지금 보면 아주 작은 포구이지만 화량에 설치한 좌도 수군첨절제사영은 함선 26척과 1,666명의 수군을 보유한 전체 경기도 수군 중에서 보유함선과 병력이 가장 큰 부대였다. 포구가 작은 이유는 조선시대의 수군기지는 전술적 필요에 의해 입구가 대단히 좁고,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넓어지는 항아리형 포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화량에 좌도 수군영을 배치한 이유는 당성 앞바다에 제부도, 대부도, 선유도, 영흥도 등 크고 작은 섬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담장처럼 해안 방어선을 구축할 뿐 아니라 섬과 섬 사이를 통과하는 수로가 좁아서 적을 막기에도 유리했고 왜구를 탐지하기에도 용이했다. 더욱이 당성과 해운산, 염불산 봉수대에서 보면 제부도, 아산, 평택, 월미도일대가 한 눈에 보인다. 반면에 해안은 구봉산이란 이름처럼 바닷가에 아홉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서 있었어서 관측이 용이하나, 바다에서는 육지쪽은 관측이 어렵다.
왜구가 남양만으로 들어오면 좌도 수군이 주도하여 적을 탐지하고 저지하며, 그 사이에 최정예인 우도 수군이 합세해서 적을 타격하는 구조였다.
참도고서 : 당성(경기문화재단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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