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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향문연수업 <한국의 해양문화와 그 의미>

seoyeoul 2016. 5. 19. 11:29

출처 : http://raft.tistory.com/4

 

한국의 해양문화와 그 의미

윤명철 교수의 해양 이야기

2012.03.25 21:38

 

 

<지중해의 특성 >

  우리는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고, 과거에는 해양활동이 남달리 활발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도 해양력이 약할 수 밖에 없다.

 

  흔히들 동아시아의 역사를 육지위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동해와 남해 황해와 동중국해가 있고, 그 너른 바다를 중국대륙과 만주 및 일본열도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른바 지중해적 모습을 띄우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 지중해의 한가운데(中核)에서 모든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양문화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 민족의 위치가 영향을 받았다.

 

  지중해는 각 지역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롭다. 반면에 각 나라들이 내해(inland-sea)를 공유하고, 긴 沿岸을 여러나라가 나누어 갖고 있으므로 국경이 불분명하고 변화가 심하다. 때문에 利害도 대립되기 쉬워서 海域支配權의 對立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진다. 어느 한 국가가 내해를 통일시키려 하므로 지중해에서는 지속적인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질서구축의 軸이 된다. 균형자의 역할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또한 지중해질서는 정치 군사적인것 보다는 경제, 문화적인 내용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며, 해양력은 힘의 우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16세기 이후의 세계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지중해질서의 연장이고 해양력의 강약에 따라 국력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해양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선사사대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남해는 부산 근처나 울산과 대마도 등에서 이미 약 6000~7000년전 부터 한일 지역간에 교섭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동해북부의 서포항, 황해의 단동 등 압록강 하구 및 요동반도 및 산동반도 북부 등에서도 역시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해는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다도해가 많아 일찍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할 여건을 갖추었다. 특히 황해는 수심이 얕은 데다가 중국지역과 만주지역, 한반도가 만나는 공동의 해역으로서 일종의 내해(inland-sea)이어서 바다가 매우 안정되고 교류에 매우 유리하였다.

 

  동아시아의 바다들은 쿠로시오 황해난류 대한난류 동한한류 등 해류의 흐름과 방향이 거의 일정하고, 바람은 계절마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계절풍지대이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동아시아 해양은 일찍부터 지역간에 항해하는데 유리하였다.

 

  동아지중해의 전반적인 문화형태와 해양유적지들의 분포로 보아 처음으로 해양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황해의 양쪽 연안에 환상형으로 포진한 동이족이었다. 특히 황해서안, 즉 현재의 중국해안에 거주한 동이족은 해양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해양을 통해서 벼농사와 고인돌문화 등을 동아시아의 여러지역으로 전파하였다.

 

< 고조선과 열국시대>

  고조선은 황해북부해안을 끼고 발전하였는데, 특히 요동반도와 서한만, 대동강 하구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고조선의 무덤으로 알려진 기원전 6~7세기경의 崗上무덤과 약간 늦은 시기의 樓上무덤 등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데, 특히 강상무덤은 현 대련시 해안가에 있어 해양호족세력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현재 산동반도의 봉래와 요동반도 끝의 여순지역을 잇는 묘도군도 등을 오고가며 활동하였으며, 또한 발해만에서 서한만으로 오고가는 선박들을 관리하고 통제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강상무덤에서는 보배조개등이 나와 중국과 교역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과 한나라간에 벌어진 전쟁은 이러한 황해북부 해상권을 둘러싼 역학관계의 재편을 목적으로한 전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의 소국들이 있었다. 그 소국들은 최근에 계속해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들 외에도 삼국지·후한서 등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활발한 해상활동이 있었다. 각국들간의 교섭은 물론이고, 州胡(현재의 제주도) 일본열도의 소국들 및 중국 등과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교섭을 하였다. 이 소국들은 대부분이 해안가 또는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해양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해당하는 야요이(彌生)문화(서기전 3세기 부터 서기후 3세기까지)가 무덤양식이나 토기 농기구 무기 등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갔음을 알 수가 있다. 더우기 발견되는 인골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동일하여 주민이 집단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동은 남해동부에서 큐슈북부라는 통상적인 통로 외에도 한반도의 각지역, 특히 동해남부에서도 출발하여 일본열도 혼슈남단지역으로도 도착하였다. 물론 바다를 건넌 이러한 대이동은 해양문화가 발달해야 가능하다.

 

< 삼국시대>

  고조선의 뒤를 이어 건국한 고구려는 초기에는 만주지역에 동맥처럼 발달한 송화강 압록강 혼강 등 큰 강을 이용한 내륙수군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을 장악하여 황해북부로 진출한 이후 꾸준히 요동진출을 시도하여 요동만 해안지역에 닿았다.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동천왕 때(233년)양자강 하구 유역인 建康(현 남경)의 吳나라와 교섭한 것이 중국남방과 교섭한 첫번째인 것 같다. 이 항해는 화북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오나라의 중간에 있었던 魏나라를 피해서 먼바다에서 근해항해를 하면서 장거리 외교를 한 것으로 뛰어난 항해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후 고구려는 황해를 남북으로 오고가며 중국의 남·북조국가들과 활발한 교섭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를 물리치고 경기만을 장악한 다음에는 더욱 해상활동이 활발해졌다. 5세기 이후에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데에는 해양활동능력의 향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백제·가야·신라·왜 세력들이 중국의 남북조와 교섭하는 것을 견제하고 막았다. 또한 분단된 중국의 남북조를 해양을 통해서 동시 등거리외교로서 역학관계를 조정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4세기부터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그 흔적들이 혼슈남단의 지역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5세기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열도로도 진출을 하여 6세기 중반에 이르면 해양을 매개로 일본열도와 본격적인 해양외교를 전개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대륙경영과 함께 해양활동의 확대를 통해서 군사력은 물론 외교력을 신장시키고 동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발돋음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 경기만을 신라에 상실한 다음에는 정치 외교적 특권을 빼앗기고, 해양외교를 이용한 나당연합군의 결성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의 남북협공과 수·당의 수륙양면작전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대외진출 항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황해북부 연안항로이다. 대동강하구, 압록강 하구, 요동반도 남단 등을 출발하여 묘도군도(老鐵山 水道)를 따라 아래로 남항하다가 목적지에 따라서 연안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항법상 가장 손쉬운 항로이다. 다만 중간에 적대적인 세력이 있으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두번째는 황해북부 사단(斜斷)항로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출발한 다음에 노철산수도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면서 산동반도의 해역권에 들어온 다음에 근해항해를 통해서 남조정권이 있었던 양자강 유역까지 남진해가는 항로이다.

 

  세번째는 황해중부 사단및 횡단항로이다. 이는 대동강 하구 나 경기만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중국의 남북조를 향해 남으로 사단하거나 서쪽으로 횡단하는 항로이다.

 

  그리고 동해안에서 출발하는 대왜항로가 있다.

  두만강하구나 함흥 원산 등 동해북부를 출발하여 남으로 근해항해를 하다가 먼바다로 나가 원양항해를 통해서 노또(能登)반도 등 혼슈중부지역에 도착하는 항로이다. 해양환경이 거칠고 항법상 매우 어려우므로 초기에는 시용되기 어려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동해중부의 이남지방까지 차지한 다음에는 항로를 변경했다. 어디서 출발하던 삼척·동해 등 동해중부의 해상에서 먼바다로 나가 원양항해를 하면서 울릉도 독도를 우측으로 보고 남동진하여 혼슈의 중부이남지역인 쓰루가 노또반도 니이가타 등으로 도착하였다. 물론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아래에 있었던 시기에는 가잔 손쉬운 동해남부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경기만으로 흘러드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의 하계망을 장악하면서 이른바 경기지방을 배후지로 삼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으며, 필연적으로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4세기 초에는 북으로 고구려를 쳐서 오늘날의 황해도 해안지방까지 장악하였다. 이는 육지의 영토를 확대하는 목적 외에도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대중교통로의 확대 및 교역상의 잇점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예성강 하구 및 황해도 지역에는 전 시대부터 중국와의 교섭을 주도했던 세력들과 그 문화의 토대가 남아있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생존을건 전쟁을 벌인데는 이러한 해양질서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 전쟁의 승리 이후 백제는 중국의 북부지역과 바다를 통하여 교섭을 활발히 하였고, 또 직접 진출한 흔적이 있다.

 

  한편 남쪽에서는 마한을 정복하고 서해남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부터는 서해남부이 여러섬들을 징 검다리로 삼아 제주도를 영향권하에 넣었으며, 해상으로 일본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영토를 팽창시키는 방식이나 통치방식을 해양과 관련지어 변화시켰던 것 같다.

 

  그 후 고구려의 압박과 공격을 받고 경기만을 빼앗겨 수도를 남으로 이전하였다. 그 결과 해양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고, 중국의 북조정권과는 외교교섭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동성왕 시대 부터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황해 남부는 물론 남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중국의 남조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하여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문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더 활발해져 일본에서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불교 등 문화가 발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제동맹의 승전물인 경기만을 신라에게 도로 빼앗기므로써 해양활동은 다시 위축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급속한 성장과 나·당 동맹을 허용하므로써 패망의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의자왕의 항복 이후에는 국제적인 연계속에 부흥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해양을 활용하는데 실패하여 고구려 및 일본열도와 신속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채 실패하고 말았다.

 

  백제의 대외항로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초기에는 내부성장에 주력했으나 곧 해외교통망의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경기만을 출발하여 황해중부를 횡단한 다음 산동반도 혹은 발해만으로 들어가서 화복으로 들어갔다. 경기만을 빼앗긴 이후에는 금강하구에서 일시적으로 화북의 북위정권과 교섭을 시도하지만 고구려의 해상통제로 인하여 실패한다. 그후 금강하구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산동반도 해역권에 진입한 다음에 남행하여 양자강하구로 들어가거나, 직접 황해남부를 사단하여 양자강하구로 들어가 남조정권과 교섭하였다.

 

  한편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항로는 시기에 따라 변천이 있었다. 초기에는 서해남부 혹은 남해서부 해안을 출발하여 일단은 제주도를 우현으로 보면서 동으로 자국의 해역내에서 연안항해 내지 근해항해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먼바다로 나가 대마도를 왼쪽으로 보면서 남동으로 항해하다가 큐슈 서북부에 있는 고또(五島)열도를 바라보면서 큐슈의 서북부 해안에 상륙하거나 아리아께해(有明海)로 들어가 연안에 상륙하여 기쿠치강(菊池川)등 강을 타고 오늘날의 큐슈 중부인 구마모도의 내륙지방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기쿠치강(菊池川) 유역에 후나야마(船山) 고분 등 백제계유적과 유물이 많은 것은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그런데 후기에 들어가면 강한 국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대도를 경유하여 직접 큐슈 북부에 상륙하고, 다시 세또내해를 항해하여 당시 일본열도의 중심부인 오사까 나라 아스까 지역으로 진출한다. 해양조건 상 전라도 남부해안에서는 대마도나 큐슈의 어느지역에라도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가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이 지역에 표착한 선박들의 출발지를 보아서도 알수가 있다.

 

  한편 가야는 弁韓·辰韓 등의 해양적 전통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김해 거제도 고성 등은 일찍부터 해양문화와 대외교역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한반도의 국가들중 가장 먼저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거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본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물과 건국신화 등 가야적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가야가 한반도에서 멸망할때 까지 가야와 일본열도간의 교섭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해온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국가설이나 일본인들이 근거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임나일본설 등은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해양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알고, 양 지역간의 관계를 지중해적 질서와 성격을 토대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다.

  가야인들의 항로는 다음과 같다.

  당시 항로는 삼국지 왜인전 등에 기록된 대로 김해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경유하고, 다시 중간에 있는 이끼섬을 지나 큐슈의 북부로 상륙하는 것이다. 이 항로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가는데 가장 많이 손쉽게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고대의 항해는 해류 조류 바람 등 자연조건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특히 대한해협은 세계적으로 해양조건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계절에 따라 항해방향이 달라지며,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르다.

  오늘날의 부산인 김해는 일본열도나 대마도에서 출발한 배가 도착하는 곳이지, 그 곳을 향해서 출발하는 곳은 아니다. 가을과 겨울에 북풍계열을 바람을 받아 돛을 활용할 때는 가능하지만, 바람이 약하거나 남풍계열의 바람이 부는 봄 여름에는 김해항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연안항해를 하다가 거제도의 서쪽해역에서 다시 대마도를 향해 항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해양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동해는 바람과 해류 등 항해조건이 안좋은데다가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굴곡이 없어서 적당한 항구시설이 없었다. 때문에 신라는 해양문화가 보잘것 없었다. 오히려 초기에는 바다를 건너온 왜로 부터 빈번하게 침략을 당한다. 그런데 일본신화에 스사노노미코도나 천일창 등 신라인의 진출사실이 나타나있고, 이즈모 등에서 신라계유물이 발견된 것은 일본열도 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잇다. 그외에 비조직적인 주민들의 진출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과는 고구려 백제 등의 도움을 받아 교섭을 하는 등 국제질서의 주변부에 있었다. 그러나 진흥왕 때에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외교·군사·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중국지역과 교섭을 빈번하게 하였다. 이는 결국 해양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가져왔다. 당나라와의 동맹은 결국 해양을 이용한 비밀외교로서 성사된 것이다. 또한 백제 공격은 당의 대규모 군이 황해를 건너 중부해상권을 장악한 신라의 수군과 연합하여 감행된 것이다.

  신라인들의 항로는 다음과 같다.

  신라인들의 항로는 수 당과 교섭을 하기 위하여 남양만을 출발하여 산동반도 권으로 들어가는 황해중부 횡단항로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경기반을 출발하여 사용하던 항로와 유사하다. 또한 일본열도로는 동해남부의 울산·감포· 영일만 등에서 출발하여 동해남부를 횡단한 다음에 혼슈 남부에 있는 이즈모나 쓰루가 해역으로 들어간다.

 

  결국 삼국시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단순한 육지위주의 질서, 영토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한계가 있다. 자연지리적으로나 정치적·경제적으로 보아 동아시아의 역사는 지중해적 성격을 토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특히 이 시대의 한일 관계는 국가와 국가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간의 관계,국가와 주민간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또한 정치와 군사의 관계만이 아닌 문화와 경제간의 관계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한반도의 각국들은 먼저 주민들의 비조직적인 대량이주를 통해 일본열도의 각 지역에 진출하였고, 후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진출하였다.

 

  자발적으로 진출한 주민들은 마치 페니키아나 그리이스 사람들이 지중해연안을 항해하면서 신천지를 발견하고 개척하는 과정과 유사했을 것이다. 먼저 상륙한 지점을 항구를 만들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안가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리이스인들이 해양폴리스들을 건설하였듯이 소국들을 세웠다. 그 소국들은 점차 커지자 母國격인 한반도의 각국들은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이주정책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열도의 몇 지역에서는 해양조건에 따라 몇개 지역에서 친 가야, 친 백제, 친 신라계 등의 더 큰 나라들이 만들어졌고, 결국 그 국가들은 격렬하게 통합전쟁을 벌이면서 모국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통일사업이 점차 완료되가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서 모국과의 관계는 재정립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통일세력은 독립성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한반도 각국은 물론 중국세력 등과 국제적으로 등거리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한 반면 모국인 한반도의 각국들은 서로 싸움을 하다가 결국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을 완료하였다. 이 신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은 일본열도로 망명을 하였고, 일본의 통일세력 역시 한반도와는 지중해적 질서속에서 형성된 모자관계를 완전히 끊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하였다.

 

< 남북국 시대.>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고 남북국 시대가 전개된 이후 통일신라는 삼국의 해양문화를 토대로 삼아 매우 활발했다. 초기에는 당과의 전쟁을 위해서, 또 일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해군력 증강에 힘을 썼다. 그 후 동아지중해의 바다에서 군사적 긴장이 풀리면서 외교 문화 경제적 목적을 위한 해양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張保皐로 대표되는 재당 신라인들은 상업적으로, 때로는 외교사절의 역할까지하면서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운하주변과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 해안의 내륙은 물론 일본열도까지 활동범위로 삼았다. 황해, 남해, 동해 및 동중국해에서 일정한 연계성을 가지고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여 동아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9세기 전기에 신라의 해적이 일본열도에 자주 출몰한 사실들을 보면 민간인들의 해양활동 또한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인들의 항로는 다음과 같다.

  항해범위는 전 시대에 비하여 더욱 확대되고 항로도 길었다. 황해중부의 횡단항로는 남양만, 즉 현재의 화성군에 있었던 당은포를 출발하여 직항한 다음에 산동반도에 도착하였다. 그 항구는 역시 오늘날의 봉래인 등주였다. 반면에 민간인들은 산동반도 동쪽끝 아래에 있는 赤山浦 乳山浦 등을 항구로 하였다. 특히 당을 출발한 항구로서 분명히 기록된 곳은 적산포인 현재의 榮成시 석도항과 그 앞에 있는 鏌鎁島이다.

  남쪽은 황해남부 사단항로가 있었다. 전남해안 출발하였는데 현재의 會津을 그 출발항구로 보고있다. 도착은 회하유역의 도시와 장강하구 및 현재 영파인 명주항이다. 장보고의 선단들은 명주 앞의 주산군도를 출발하여 북상하다가 항해를 사단하여 한반도 남부로 상륙하거나 동중국해를 사단하여 제주도에 도착하거나 경유하여 신라 혹은 일본까지 항해하였다. 지금도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에는 신라상인들에 대한 전설과 함께 新羅礁가 남아있다.

  한편 발해는 고구려의 해양능력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건국 초기에 무왕은 張文休로 하여금 수군과 함선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등주를 공격하고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요동반도와 등주를 잇는 묘도군도는 선사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항로였다. 따라서 이 항로를 둘러싸고 당과 갈등을 벌였다.

 

  일본과는 건국초부터 시작하여 공식적인 기록만 발해가 일본에 34회, 일본이 발해에 13회 파견하는등 빈번하게 정치 경제적 교섭이 있었다. 특히 9세기에 이르면 한번에 100명이 넘는 사절을 파견하기도 한다. 양국간의 교섭은 신라와 당이라는 두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발해와 일본은 나당 동맹으로 인하여 붕괴된 고구려 백제 왜의 질서가 새로운 형태로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와 신라를 경계해야하는 지정학적인 역학관계상 발해와 일본은 해양외교를 통해서 협조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외에 경제적 협력을 위하여 민간인들의 접촉과 교역도 상당했다. 당시 이루어진 교역의 내용과 품목을 보면 양국간의 교역은 매우 활발했다. 이는 자연환경이 험악한 동해를 건너다니는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해양능력이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발해인들의 항로 다음과 같다.

  고구려와 거의 유사하였으나 보다 북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조건은 더욱 나빴다. 발해인들은 북풍계열의 바람을 활용하여 동경인 용원부를 출발한 다음, 현재 나진 선봉에 해당하는 두만강 하류에서 출발하거나, 육로로 그 북쪽에 있는 옛 鹽州인 불라디보스토크 근처 항구에서 출발하여 연안 또는 근해항해를 하다가 동해북부를 사단하여 원양항해로써 혼슈중부의 니가타 노또반도 쓰루가 등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쓰루가에는 지금도 발해사신들이 묵었던 객관이었던 게이신궁(氣比神宮)이 있다. 물론 남경 남해부인 경성 혹은 함흥부근에서 출발하여 역시 동일한 항로를 사용하여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역시 동해항로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희생도 많이 뒤따랐다.

 

  그외에 압록강의 하구인 박작구에서 항해를 시작해서 서한만으로 빠져나가 서쪽으로 요동반도를 타고 연안항해를 한 다음에 여순인 마석진에서 묘도군도를 타고 내려가 산동반도 북부의 등주항에 도착하는 항로가 있다. 초기에는 당의 공격로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교섭로로 사용되었다.

 

<고려 이후>

  고려는 왕건이 해양세력임에서 보여지듯 해양활동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후백제의 견훤도 절강 지방의 오월국과 바다를 통한 교섭을 하였다.   고려와 송은 거란족의 나라인 요를 견제하기 위하여 정치외교적인 교섭이 절실했고, 또 문화의 교류와 교역도 필요했다. 그런데 요가 북방에 있었으므로 양국은 바다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초기 북송의 시대에는 주로 고려의 예성강구를 출발하여 甕津반도 지나 산동반도의 등주항이나 密州에 도착하는 황해중부 횡단항로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고, 남송이 성립되면서 고려는 중국의 강남지방과 활발한 교섭을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주로 현재의 福建·廣東·浙江의 상인들이 고려에 많이 왔다.

 

  고려의 항로는 다음과 같다.

  이 교섭은 황해중부항로를 이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히 황해남부항로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절강의 영파는 명주로서 남송 당시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고려에 온 북송의 사신 徐兢이 쓴 高麗圖經에 의하면 당시의 항로는 경유지와 걸리는 시간및 해양조건과 상태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대 사람들은 영파를 출발하여 주산군도의 섬들을 지난 다음에 연안항해를 통해서 현재의 상해만 까지 북상한 다음에 동북상으로 사단하여 흑산도를 경유하여 예성강구의 벽란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필자의 직접 표류항해에 의해 발견한 사실이지만 고려인들은 재당신라인들 처럼 주산군도를 출발하여 막바로 동중국해를 거쳐 황해남부를 사단하는 항로도 있었다. 이외에 광동이나 복건을 통해서 들어온 서역문화도 이 항로를 이용하여 고려에 들어왔다.

 

  불교나 고려자기 등 고려는 주로 이 항로를 이용하여 문화를 교류하였고, 특히 서역과 간접교역을 할 수가 있었다. 한편 일본상인들도 김해를 통해서 고려에 들어왔으며, 현재의 오끼나와인 琉球國과의 교섭도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해양문화는 매우 미약해졌다. 초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 정벌 등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또한 조선술에도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형태의 선박을 건조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해양문화는 천시되고 수군활동도 미미해졌으며 空島정책을 취하는 등 민간인들의 대외해양활동을 원천적으로 금하였다. 조선은 바다를 막고, 지중국 질서만을 채용하여 오로지 중국과의 교섭만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주변부로 전락하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해양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그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해양의 중요성과 역할이 거론되었으며, 해양력은 동아의 역학관계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일본의 중국침략 등은 해양질서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아시아는 완충지대 없이 한반도의 땅과 바다에서 양극질서가 직접 대결하는 양상을 띄웠다. 이러한 첨예한 군사대결 속에 바다는 막히고, 그 결과 교류와 교역의 지중해적 질서는 사라졌다. 이처럼 20세기는 유일한 연결통로인 바다가 폐쇄되고 단절되어 동아지중해권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세계질서,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려고 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해로를 장악하고, 해양조정력을 가질 경우 각국 간의 역학관계를 조할수 있고, 막대한 경제적 문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해양력은 한 나라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잘 활용하면 주변으로 진출할 수가 있고, 교역 등 경제력을 향상시킴은 물론 주변 각국들간의 역학관계를 조정할 수가 있다. 반도가 자기 앞마당에서 해양력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주변국들에게 포위 당해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양력이 약하면 오히려 바다에 포위되어 폐쇄적이 되고 해양력이 강한 주변국들에 의해 민족의 이익과 자주가 침탈 당할 수가 있다. 21세기에 해양력은 동아시아의 역학관계의 기본틀과 우리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