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원인>
스탈린 시대의 경제적 근대화는 역설적으로 소련 침체의 원인이 되었다.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 방식은 소비재 산업을 경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수준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계획경제 체제는 생산기술 혁신에 대한 노동자들의 주도권을 가로 막았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한 미국과의 군비경쟁과 우주개발 사업은 가뜩이나 어려워지고 있던 소련 경제에 더욱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선출은 그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개혁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재건과 개방을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양대 슬로건으로 내세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를 완화하고 국영 기업들에게 독립 경영을 허용했으며,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를 민영화했다. 또 언론검열을 폐지했고, 사회주의 진영 전체를 위해 개별국가들의 주권을 제한 할 수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압박해 온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추진 과정에 뜻하지 않은 역풍을 맞아 실패하게 된다.
당은 민의를 수렴해서 그것을 정부에게 전달하여 국민을 위한 정책으로 전환하고, 정부의 국가운영 방침을 국민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데, 정치적 억압으로 경직된 당이 국민과 정부 사이의 전달 벨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의 구테타로 집권당이 스스로 자멸하는 일이 발생한다.
개혁의 부작용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언론에 대한 검열을 철폐하자 그동안 은폐되었던 국가권력의 폭력이 드러나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이 개혁을 주도하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났다. 또 경제 자유화 조치로 인한 사재기 현상도 만연하였고, 경제 전반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다. 그리고 알콜 중독을 막기 위해 보드카 제조를 금지하자 역으로 국가 세원에 공백이 발생하고 재정 부족 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이른바 개혁 조치들이 오히려 개혁에 발목을 잡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 이다.
가장 결정적인 타격은 민족분규에서 비롯되었다. 개방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펼쳐지면서 그동안 소련 전체를 지배하던 사회주의 이념이 흔들리면서 소수민족이 동요하게 된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폐기되면서 통제력이 사라진 동유럽 국가들의 선거에서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즈음에 발트해 지역에서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공화국들에서 평화시위가 발생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민족분규가 일어나는데 고르바초프 정부가 초기대행에 실패하면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개별 공화국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러 연방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연방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70년 넘게 이어온 소련 사회주의 체제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소련의 해체과정에서 러시아 민중이 보여준 태도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로 요약된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의 구테타 당시 모스크바의 민중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군대를 막아서고 옐친을 중심으로 뭉쳐서 더 이상 과거 체제로의 복귀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민중은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려는 각종 사회적 논의와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더 나은 미래 건설의 동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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