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에서 레지스탕스가 지니고 있는 의미>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정치는 경제난과 실업, 사회 불안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1922년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노선의 무솔리니 정권이 들어섰고, 1931년 독일에서는 히틀러 정권이 수립되었다. 프랑스에서도 파시즘에 가까운 우익이 강력하게 대두했었으나, 공화국수호를 목표로 한 좌파연합, 곧 인민전선이 결성되어 내부에서 대두하는 파시즘을 막았다. 좌파연합에는 정통 공화파인 급진당과 사회당, 공산당이 합류했다. 그러나 인민 정부는 국내 압박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독일의 침략 앞에 무력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40년 6월 14일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 정부는 독일과의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드골 장군은 즉시 런던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을 결성하고 대독 저항을 이끌어 나갔다.
드골은 프랑스 해방에 식민지가 협력하면 대가를 내놓겠다고 약속했고, 자유 프랑스군은 식민지 각지에서 군인을 모아 영미 연합군의 일원으로 프랑스 국토 수복 전투까지 담당했다. 한편 국내 저항운동의 지도자 장 물랭은 런던으로 드골을 찾아갔고 흔히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대독저항을 해외의 자유 프랑스군대와 국내 저항세력의 협력을 이뤄냈다.
레지스탕스라는 프랑스어 그대로 부르는 대독저항은 프랑스 전역에서 다수가 참여한 운동은 아니었다. 유고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미약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 운동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프랑스의 항복에 승복하지 않은 레지스탕스는 우선 구국을 위해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그런 행동이 공화국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해외의 자유 프랑스군대와 국내 저항운동의 협력을 이뤄 냈던 것이다. 프랑스 내 레지스탕스는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지만, 엘리트와 민중이, 농민과 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레지스탕스는 사보타주부터 무장 항쟁까지 다양한 저항운동을 일으켰고 신문, 전단, 시와 소설 같은 폭넓은 선전도 사용했다.
레지스탕스는 지역과 집단이 다양했기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고, 밀고와 배신의 혐의도 짙어지곤 했다.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처형을 당했고, 피에르 브로솔레트는 고문실에서 투신자살하기도 했다. 장 물랭은 리옹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후 베를린으로 이송 중에 열차에서 사망했다. 수많은 대원의 희생을 딛고 1944년 3월 다시 개최된 전국저항평의회는 공동강령을 작성했으며, 이 강령은 전후 새 사회의 청사진을 그렸는데, 그 내용은 비시정부 요인들의 숙정부터 금융과 기업의 국유화, 보통선거 확립, 사회보장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유산인 공동강령을 이행했으며, 자국민에 대한 고문을 금지하고, 사회특권층 위주가 아니라 진심으로 국민의 복리 증진을 도모했다.
무엇보다 저항운동의 희생과 변혁 의지는 프랑스의 밑거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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