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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오하우섬에서의 일정 시작

seoyeoul 2024. 3. 22. 14:09

우리 숙소는 와이키키해변 근처에 있는 Holiday Surf Hotel인데,

스튜디오 형식의 숙소여서 숙소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있다

어제 월마트와 세이프웨이에서 장 봐 온것으로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크램차우더 스프와 빵

미국에 오면 꼭 먹어야지 했던 음식-크램차우더

전에 데이비스에 살 적에 맛 있어서  자주 먹었던 음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씩 미국에 오면 꼭 사먹는 음식이 되었다

 

크램차우더+바게트 빵을 아침식사로 먹고 예배 드리려고 집을 나섰다

미리 검색한 <에덴 교회>라는 곳으로...

이곳 근처인데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다

한바퀴 돌고 나서 차길이 아닌듯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거기가 교회였다

아침 8시 30분 예배

박충기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그곳 담임목사님은 아니고 본토에서 초청한 목사님 이신듯했다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졌다

예배 후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 나왔는데, 어떤 집사님(?)이 나오셔서 같이 교제를 하고 가시라고 붙잡으신다

우린 여행객이고 숙소에 기다리고 있는 일행이 있어서 가 봐야 한다고 거절했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인절미를 포장해서 주신다

하와이 인절미 맛보라고 하시면서...(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홍미애씨 부부와 합류하여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은 하와이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고, 그 근처에 있는 뭔가 볼거리가 있으면 같이 보는 것으로 계획.

사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중국이나 일본을 많이 떠올리고 있지만 미국-미국에서도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도 활발히 진행하였다고 한다

 

2015년 8월 28일 동아일보에 하와이 독립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서 7,000km가량 떨어진 섬 하와이. 일제강점기에 제물포항에서 배로 보름 넘게 항해해야 닿았던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벌어졌다

하와이로 이주한 주민들은 기온이 29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독립운동 후원금을 모았다

당신 교민 1명이 낸 후원금은 연간 5~10달러였다. 농장 월급이 15~20달러였으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교민들은 '하와이가 8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으니 이곳에서 번 돈을 조선 팔도를 살리는데 쓰자'며 뜻을 모았다고 한다

후원금은 1903년경부터 결성되기 시작한 항일민족주의 단체들을 통해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보내졌다

후원금은 무장투쟁부터 비폭력운동까지 폭넓게 쓰였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 1932년 이봉창의사의 수류탄 투척 의거와 관련해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준 돈이 거사를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기록했다. 한인애국단이 이봉창 의사에게 보낸 최후의 거사 자금 300원(현재 가치로는 약 600만원)의 출처도 하와이 교민의 후원금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할 때도 하와이 교민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호놀룰루시 포스터 공원 인근에는 박용만 선생이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한 <대조선 독립단의 터>가 있다. 박선생은 이곳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 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장정 240여 명은 마땅한 훈련 장소가 없어 한인 출신 농장주가 운영하는 파인애플 농장을 빌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나무총을 휘두르는 주경야련을 이어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비폭력 투쟁의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 뒤 한인중앙학원과 한인여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사업에 나섰다. 학교 터에는 현재 초등학교가 지어져 있다

 

하와이 내의 독립운동이 꽃을 피우진 못했다. 노선이 달랐던 박 선생님과 이 전 대통령이 갈등한 탓도 있지만 일본 측의 압력도 독립운동을 위훅시켰다. 1920~1930년 하와이 내 일본 이주민은 한인(4,500여 명)보다 십수 배 많은 7~8만 명이었다. 일본 영사관은 한인들에게 도항 허가서를 발급해주지 않거나 농장 취업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립운동 움직임을 억눌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간곳은 오하우 공동묘지

이곳에는 건국훈장 수여자 21명이 잠들어 계시다

여기에는 상당수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계시는데, 이들 상당수는 하와이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던 한인총각들이 보낸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온 결혼 이주 여성들인데, 교육 수준이 높아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한 곳은 바로 교회였다

이민 생활에서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를 믿는 모임이 아니라, 한인들의 휴식처이자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정치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세운 한인기독교회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고 교회 내에선 한인 아동을 위한 한국어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한국의 이민자가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곳, 7번 부두이다

한국이민사의  하와이 시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본다

이곳에는 미주한인 이민 120주년 기념을 위해  2024년 1월에 인천시장이 설치한 표지석이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알로아 타워로 발을 옮긴다

알로아 타워는 1926년 당시로는 천문한적 금액이었던 16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세운 하와이 고딕양식 등대로, 호롤룰루로 입항하던 수많은 이민자들을 가장 먼저 맞이해주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1994년까지 등대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상업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10층 높이(56m)의 큰 키에 깃대(12m)까지 더해져 하와이에서 키가 큰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히고 타워에 내장되어 있는 커다란 벽시계는 건축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시계였다고 한다

 

 

이제 진주만 역사 지역(Pearl Hobor Historic Sites)으로...

이곳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이 있었던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가 위치하던 곳인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USS보우핀 잠수함&뮤지엄 파크, USS 배틀십 미주리 메모리얼, 태평양 항공박물관, USS 애리조나 기념관이 있다

우리는 USS애리조나 기념관만 둘러보았다

 

이제 이올라니 궁전으로...

이올라니 궁전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맞은 편에 있는 카메하메하 동상과 시청 겉모습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것임.

<하와이 파이브 오>에서  그들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하와이에 가면 꼭 저곳은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ㅎㅎㅎ

 

이곳에서 남쪽으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 Pow Wow>라는 아티스트 그룹이 만든 거대한 벽화가 있는 카카아코 벽화 거리(KaKaako Art Street)를 가보려고 한다.

칙칙한 공장과 창고들이 모여 있는 곳에 그려진 개성 넘치는 벽화가 산뜻함을 나타내 준다

 

빨리 펀치볼 국립묘지로 출발해 본다

그런데, 이곳은 어딘가 익숙한 곳이다

어제 탄탈루스 전망대 가기위해서 지나갔었고, 오늘 오전에도 지나간 곳이다

세계 최초의 한인교회이고,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교회인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보이길래, 잠시 들려서 사진 몇 장 찍었다

 

이제는 펀치볼 국립묘지로 go, go

국립묘지 앞에 도착했는데, 문을 닫고 계셨다

시간이 되면 문을 닫는다는 생각을 못했다

헌화하겠다고 꽃까지 사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나???  ㅠㅠㅠ

우리가 너무 게으름을 피웠나보다

어쩔 수 없이 문  창살에 꽃을 끼워 놓고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 나온다

 

6시가 넘으니 밖이 어둑어둑해진다

숙소에 들어왔다가, 와이키키 야경이라도 보고 오자고 다시 집을 나섰다

빅아일랜드에서는 못 느꼈던 밤문화를 즐기러 숙소를 나섰다

여긴 도시여서 그런지, 밤에도 사람이 많다

완전히 시골 사람이 도시에  온 듯이 여기 저기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길을 걸어본다

 

집에서 한 10여분 걸었나보다

드디어 와이키키 도착

누군가가 웨딩 이벤트를 준비하는 듯하다

젊을때까 좋을 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