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생활/나의 이야기

네덜란드 Tulip 축제 Keukenhof

seoyeoul 2010. 4. 26. 03:59

네덜란드 튤립 축제 큐켄호프

1. 큐켄호프의 튤립(Tulip) 축제

네덜란드 서해안 Lisse시의 Keukenhof Garden에서 개최되는 봄꽃 축제

지난 60년간 4,400만명이 관람한 세계 최고의 튤립 축제 : 3월 중∼5월 중

32 ha에 100품종 450만구의 튤립 등 총 700만구의 구근화초가 노지에 식재

○ 87품종 2,500그루의 나무와 작은 호수로 구성된 아름다운 공원

3개소의 실내전시장을 구비, 전시기간 중 어느 때라도 꽃의 아름다움 만끽

2. 큐켄호프의 역사

이곳은 15세기에 사냥터였으며, 이곳에서 Jacoba van Beieren 성에 필요한 식료품을 조달하였던   곳으로 부엌(Keuken)에서 쓰는 식료품을 생산하는  정원(hof)이라는 뜻의 Keukenhof로 불리움

○ 이후 부유한 상인들의 손에 넘어간 큐켄호프는 조경디자이너 J.D. and L.P. Zocher를 초대, 성 주변을 영국스타일로 꾸며 현재의 기초를 마련

이 지역은 조합 소속으로, 1949년 당시의 Lisse시장과 많은 구근 생산자와 수출업자들의 발의로 처음 노지구근 전시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름

3. 네덜란드의 튤립

튤립의 본고장 네덜란드는 본래 튤립의 자생지가 아님

튤립의 자생지는 중부아시아의 히말라야 산맥 북쪽과 코카서스 남부지방, 터키 등이며, 16세기까지는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튤립을 개발.

※ 현재 세계적으로 100여종의 야생종이 존재

당시 네덜란드의 해상무역 발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귀족적인 튤립 꽃 문화가 형성되어 결국에는 광적인 튤립 투기열풍과 폭락(1634-1637)으로 국가적 경제위기 초래

 

4. 네덜란드 튤립 투기

1492년 10월 12일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은 스페인, 포루투갈의 대항해 시대로 부터 시작하여 신대륙과 신항로로 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향신료, 비단 등을 가져와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스페인, 포루투갈의 몰락 후 네덜란드는 당시 새로운 부의 원천인 신대륙과 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위해서 대형 선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이 자금을 확보하고자 1602년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회사 설립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였고 상인들과 정부가 주도적으로 투자에 나섰고 일반 시민들까지 너도 나도 주식에 투자를 하였지만 설립후 10년 동안 동인도 회사는 이득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계최초의 주식거래소를 개장하여 주식시장으로 부터 막대한 양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이윤을 내지는 못하였지만 신대륙으로 부터 얻을 수있는 막대한 부의 미래를 보고서 투자가 줄을 이었고 주가는 올랐으며 영국, 프랑스등의 외국인들도 동인도 회사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유럽의 자금이 네덜란드로 모여들게 된다.

막대한 양의 자본이 거래되기 시작하자 자본의 원할한 거래를 위해 세계최초의 은행을 설립하게 되고 자본주의 경제의 기반이 형성된다.

자본주의 경제 기반을 세계최초로 마련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국가에서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더 많은 부를 만들 대상을 찾게 되었고, 그 것이 튤립투기로 이어졌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으면 군 계급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최상급 꽃은 잎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라고 불렀고, 그 아래 단계의 꽃은 '총독', '제독','장군' 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황제튤립' 한 뿌리면 암스텔담의 대저택을 살 수 있었다고 하니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싼가격이었다.

1637년 2월 5일 네덜란드 알크마르 튤립 경매장에서 양파 모양의 튤립 뿌리 하나의 가격이 무려 4억원에 팔릴 정도로 '튤립 투기'가 극에 달하였다.

귀족, 상인, 변호사, 농장주, 선원, 농부, 시녀, 시종, 굴뚝 청소부 할 것 없이 모두가 튤립시장에 가진 돈을 쏟아 부었고 (당시 고가주였던 동인도회사의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던 가난한 서민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튤립 한 뿌리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나중에는 프랑스 사람들 까지 튤립 투자에 뛰어들었다.

튤립 뿌리 하나의 가격이 너무 비싸고 양도 부족하자 튤립 뿌리를 살 수 있는 권리를 싸게 파는 거래가 나타난다.  툴립 뿌리는 표준화되었고, 네덜란드 중앙은행인 비셀방크의 은행권이나 동인도 회사의 주식과 같이 취급되었다

`튤립 광풍'은 1636년 12월~1637년 1월 최고점으로 올랐다가 2월에 고가에 튤립을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안을 느낀 일부 투자자가 손을 떼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튤립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하여 하루 만에 가격이 절반으로 떨이지기도 하고 결국 튤립의 가격은 이전가격의 1%수준, 심지어 그 이하로 떨어졌다.

마침내 1637년 2월 튤립 시장이 붕괴했다. 튤립 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는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튤립 시장의 불안은 1년 뒤인 1638년 5월까지 지속됐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 퍼센트만을 지급(1000원→35원)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명령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유례없는 경제 공황을 겪게 되었고 결국 영국에게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겪게 된다.

(튤립 투기는 인터넷 검색하여서 정리한 것임.)

5. 네덜란드의 화훼산업

과거 튤립으로 인해 국가적 경제파탄을 초래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튤립을 비롯한 구근화훼(알뿌리 화초)를 국가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발전시킴.

화훼는 네덜란드의 주요 수출품목으로서, 세계 화훼무역의 중심역할을 하며, 특히 구근화훼는 세계시장의 90%를 점유.

농업의 부가가치는 479억 유로(‘07)로서 국가경제의 9.6%를 점하고, 농업수출액은 640억 유로(’08, 236억 흑자)로서 세계 2위, 국가무역흑자의 2/3 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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