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312

패턴2) I am sorry for(about)~

I am sorry는 상대방에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의 사과를 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사과할 때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상대방에게 가벼운 부탁을 할 때나, 상대방에게 '유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애석합니다'의 의미를 전달할 때도 사용된다. sorry는 기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유감스러운' 의미를 갖는 형용사로 I am sorry for(about) + 명사(동명사)와 함께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I am sorry to + 동사원형 혹은 I am sorry that+주어+동사 문장으로도 쓸 수 있다. I am sorry for making a noise.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I am sorry for being late. 늦어서 죄송합니다. I ..

다시 시작하는 패턴연습 1. Thank you for~

수요 영어 스터티 팀의 공부를 위해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 Thank you for~ 우리말의 '감사하다'의 표현에 해당하는 영어는 'Thank' 이다. 'Thank you'는 우리가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가장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Thank you 뒤에 very much, 혹은 so much를 붙여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도 표현하는데, 여기에서는 Thank you for~란 표현에 대하여 얘기해 보겠다 구체적으로 for 뒤에 오는' ~이 고마워요'라는 뜻이다. Thank you for~ 뒤에는 동명사나 명사가 온다는 점에 유의하면 된다. Thank you for A : A에 대하여 고맙다 Thank you for the present 선물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loving me 나를 ..

향교와 서원(남양향교, 안곡서원을 다녀와서)

Ⅰ. 서론 향교와 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교 건축으로,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향교는 고려때 세워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들어 고을마다 설치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서원은 16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학 교육기관으로서 특별한 인물을 배향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향리의 미풍양속을 순화하는 교화 기능과 인재를 키우는 교육 기능을 가진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상징이자 전승의 중심지였으며,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전통시대의 교육을 담당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현재 화성시에는 남양향교와 안곡서원이 남아있다. 집에서 남양향교까지는 자동차로 25분 정도, 다시 그곳에서 안곡서원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었다. 남양향교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 관리자님께 전화를 하여 방문예약을 하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날은 관리자님께서 안 계시..

조선시대 객사의 주요 기능 2가지와 공간구성의 특징

조선시대 객사의 주요 기능 2가지와 공간구성의 특징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객사의 신축이 활발히 늘어났다. 객사의 기능을 보면 빈객의 접대와 정치를 베푸는 시설로서의 사용되었고, 이 외에도 유교적 의례를 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방관 혹은 사신이 국왕에 대해 예를 올려야 할 때, 즉 국왕이 임명하여 보낸 관찰사를 맞이하거나, 국왕의 명령서인 논서를 받아들이는 의례 등 국왕에 대한 모든 의례가 객사의 정청에서 행하여 졌다. 읍치에 군현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거처인 공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아가 아닌 또 다른 권위적인 공간인 객사를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방통치가 지방관이 아닌 국왕에 의해 직접 이루어지고 있음..

조선시대 읍치에 반드시 설치되었던 기본시설

조선시대 읍치에 반드시 설치되었던 기본시설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진행된 읍치에 대한 시설로는 통치관련 시설과 교육시설, 제사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객사와 공아와 같은 시설들은 국왕에 위한 직접 통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권위와 위엄을 갖춘 통치시설로 정비되었고, 그 외에 교육시설인 향교와 함께 문묘, 사직단, 성황단 등의 제사시설, 군사시설, 창고시설, 상업시설 등을 배치하였다. 읍성의 평면형태는 주로 방형(方形), 원형(圓形), 자연지세형(自然地勢形) 등이 있는데 초기 평지의 읍성은 방형으로 각 방향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으며, 시대의 경과에 따라 원형에 가깝게 조성되었는데 성 둘레가 클수록 자연지세형에 따랐다. 성내에는 중앙 북측에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두고 일부 주민을 수용하여 행정..

삼국시대 도성의 독특한 특징

삼국시대 도성의 독특한 특징 세 가지 도성은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궁성과 관부 및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으로,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을 의미한다. 즉, 도성은 특정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는 읍을 중심으로 외곽에 담장 형태의 시설물을 설치하여 방어 및 통치체계를 갖춘 구조를 말한다.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도(都)와 성(城)이 결합된 것으로, 시(市) 대신 사용된 성의 등장이 주목된다. 도읍을 감싸는 성은 경계 설정과 방어체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도성의 구성요소에서 성·문·중심건물은 성을 구성하는 필수 구성 요소 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종묘 등과 같은 의례시설은 환도산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도로의 ..

조금새끼, 뱃동서

‘조금’이라는 말의 의미는 ‘작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울러 ‘사리’라는 말은 ‘길다’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바닷가 어촌에서는 ‘조금’과 ‘사리’의 개념을 모르고서는 일자 무식쟁이 취급을 받았으며, 어촌에서 삶을 영위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는 말의 어원을 찾다 보면 조수간만의 자연현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태양과 지구 그리고 달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되는 조수간만 현상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순응의 섭리를 통해 인간사 곡절을 살피게 된다. 태양 · 지구 · 달이 일 직선상에 놓였을 때를 ‘대조기(=사리, 바닷물 고저 차가 크다)’라 하고, 태양 · 지구 · 달이 직각을 이룰 때를 ‘소조기(=조금, 바닷물 고저 차가 적다)’라 이른다. 바닷물이 육지로 가장 많이 들어오는 만조와 바닷물이 육지에서 ..

당성

들어가며 화성시의 서쪽 송산면과 서신면, 마도면의 경계점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구봉산. 봉우리가 아홉이라 해서 구봉산이라는데, 실제 도드라진 아홉 봉우리가 미약해서 헤아려보기 어렵다. 아마도 옛날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뱃길의 순조로운 항해를 위해 뭍의 지형을 살피도록 하는 경향에 따라 구봉산이라 불리웠을 터이다. 구봉산은 날씨가 쾌청할 땐 당진지역과 인천 연안까지의 경기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확보함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 당성이 구봉산을 구렁이 휘감듯 자리하고 있다. 당성은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던 당..

근대적인 유행과 패션이 식민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의복은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사회집단의 성격과 문화를 보여주며, 시대를 이해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개화기에 복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옷차림새가 바뀌었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별기군이 서양 복식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다. 1900년대에서 1910년 사이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상류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1920년대가 되면 양복이 의생활 문화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차츰 일반 사람에게 퍼졌다. 경성과 대도시에서 일본 사람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 관리와 상인도 곧잘 입었다. 193..

근대에 들어온 기호식품인 '커피'가 우리문화에 수용되는 역사적, 문화적 과정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식은 차츰 일반인에게도 알려졌다. 유길준은 에서 “서양사람들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숭늉 마시듯 마신다”고 소개했다.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기호품 중 커피에 대해서 글을 써 보려고 한다. 가배 · 가비 · 가피 · 고히 · 카피 · 커피 등은 모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커피를 칭하던 용어들이다. 개화기에는 가배, 가비, 가피와 카피 등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신문에는 커피, 카피, 고히 등으로 쓰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화기 민간에서는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커피색이 검고 쓴맛이 나서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송대 교재에는 1896년 아관파천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