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근대 최초의 여성 유화가이자,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여성문학을 구연한 작가이자, 봉건적 관습에 저항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여성해방론자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1986년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나혜석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도 갔다. 도쿄의 조선 유학생 사회에서 나혜석은 여성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 문인으로도 빛을 발했다. 나혜석이 최초로 쓴 글인 <이상적 부인>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을 가정 안에 묶어두는 현모양처론을 부정하며,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자각을 가진 여성으로서 현대사상을 이해하고 지식과 품성으로 그 시대의 선각자가 되는 것이 이상적 부인이라고 주장했다. <잡감>에서는 그때까지 여성에게 미덕이라고 강요되어 온 것을 거스르고 나아가는 것이 자각한 여성의 임무임을 힘주어 강조했다. 조선 여성의 선각자는 여자가 너무 설친다는 욕을 두려워하거나 여자답게 안존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여성이 해야 할 사업을 못 해서는 안 된다며, 여성도 사람이 될 것을 주장했다. 1918년에는 신여성의 각성한 삶의 방식에 동의하게 만드는 실천적 삶을 그린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문학과 미술 양 방면으로 활동하던 나혜석은 최승구, 이광수, 염상섭 등 지식 청년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최승구는 나혜석과 연애를 하던 사이였었고, 문학 방면에서 나혜석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18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미술 교사로 일하던 나혜석은 3.1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5개월 남짓 감옥살이를 하면서 나와 국가에 대해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번민하게 되었고, 사회나 국가보다는 ‘내 한 몸’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으로, 즉 ‘나’를 모든 판단의 기준에 놓게 되었고 나를 잊지않고 나에 충실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나(자기)에 대한 자각은 이후 나혜석의 많은 글과 행보에서 계속 등장하는데, 이것은 여성이 자기를 희생하고 남성에게 헌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당대의 금기를 넘어서는 힘이 되었다.
유학시절 예술과 생활의 동반자로 사랑했던 최승구가 병으로 죽은 뒤, 예술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서양화가의 남편 되기를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고 나선 김우영과 결혼했다. 결혼 후 일본 외무성 관리로 만주 안동현 주재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이주한 후 부영사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국경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고, 그곳에서 여자 야학을 여는 등 민족주의 운동 참여하면서 화가이자 문필가로서의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첫딸이 돌이 된 시점에 서 쓴 <어머니 된 감상기>는 출산 및 육아에서 여성이 겪는 감정의 변화와 고통, 환희 등을 매우 솔직하게 써 나감으로써 여성의 경험을 공론화하고 기존의 관념을 비판했다. 부부간의 대화 형식으로 쓴 <부처 간의 문답>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의식주를 의지하는 예속적 생활이 아니라, 남편 김우영이 아내 나혜석에게 사랑을 의지하는 생활임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기도 하였다.
1927년 6월부터 1929년 2월까지, 젖먹이를 포함하여 세 아이를 칠순의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1년 반 동안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구미여행은 나혜석 인생의 절정기였으나, 그 절정에서 파탄이 준비되고 있었다. 구미 각국의 정치 시찰차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함께 파리 관광을 다니고 예술을 논하면서 나혜석은 예술과 일상의 삶을 연인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최린과 연애에 빠진 것이다. 여행에서 나혜석은 각국 여성들의 삶과 조선 여성의 삶을 비교하면서 여성운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혜석은 여행을 통하여 지적동반자로서 함께하는 부부, 프랑스 사교계의 개방적인 풍조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참정권 운동자를 만났고, 미혼모와 그 아이들을 돌보는 복지시설도 보았다. 또 최린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내나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30년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 이혼을 하였다. 어머니로서의 친권은 박탈되고 돈 한 푼 없이 쫒겨나는 조선의 법률 앞에서 나혜석은 무력했고,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나혜석의 발목을 잡던 일상의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 예술에 전념할 가능성을 열었다. 이혼한 직후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이 특선으로 뽑히고, 같은 해 도쿄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역시 「정원」이 입선한 것을 계기로 화가로서의 생활에 전념하고자 했으나, 1932년 애써 그린 그림을 화재로 잃고, 건강도 나빠졌다. 이 이후로 그림보다 글에 더 노력을 기울였고, 글로써 대중들에게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4년 나혜석은 여성 일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봉건적 인습에 지배받는 남편과 조선 사회를 고발하는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고,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내면서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두 남녀의 연애, 결혼, 이혼 과정의 보고서일 뿐만 아니라, 이혼 시 아내의 재산분할권과 자식에 대한 친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 대한 고발 의미도 있는 <이혼 고백장>에서는 정조에 대한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는 정조란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취미’라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가 가져야 하고, 그것은 취미와 같은 것이어서 개인의 선택에 맡겨둘 일이지 도덕이나 제도로 강제할 사항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며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넣은 김우영과 최린, 그리고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와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인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는 것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935년에 충남 예산읍 공회당에서 수덕사 근방의 전경을 그린 40여 점의 작품으로 전람회를 열었으나 조선 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1937년 무렵부터 해방되기 직전까지 나혜석은 수덕사 아래의 수덕 여관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일시적으로 딸의 봉양을 받기도 했으나, 한군데 안착하지 못했다. 친지들에 의해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 졌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이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신분을 감춘 채 홀로 눈을 감았다고 당시의 관보(1949. 3. 14)는 전한다. 아마도 행려병자로 길 위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한 개인은 자기가 태어난 시대를 넘어서기 힘들다. 나혜석 역시 근대사회로 변환하는 길목의 조선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시대적 운명을 넘어서기 위해 피투성이의 싸움을 치렀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나 변화한 한국 사회는 치욕과 풍문 속에서 그를 불러내어 억압에 맞섰던 당당한 선구자로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해방 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이를 선취했던 화가로서, 작가로서,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여성해방론자로서 다양하게 조명을 받고 있다.
나혜석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여권 운동가이자 여성해방론자임은 분명하다.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봉건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최초로 여권의 신장과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며, 그 당시 사회에 큰 의미를 기여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잘못을 함으로서 한 집안의 평화를 깨고, 가정이 파탄을 이르게 한 점은 그녀의 긍정적인 업적을 스스로 희석시키고 빛을 잃게 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남는다.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었고, 여권운동의 선각자였지만, 그녀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자유연애가 였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분방한 연애관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정신적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내몰림으로 53세의 젊은 나이에 길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의 한 부분이다. 나혜석과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에 이글처럼 후손 여성인 우리가 지금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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