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지역 문화-천주교
내포(內浦)는 충남 서북부 가야산 주변을 통칭하는 지역으로 중국으로 부터 선진불교가 전래된 지역과 천주교의 성지이고, 서민문화의 전승지이며 서해안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유한 지역이다.
사전적 의미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후미진(휘어 들어간)부분' 순수한 우리말로는 '안-개'란 뜻으로 내포지역은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까지 들어와서 이 수로를 따라 포구가 발달 된 지역'을 뜻하며, 산이 별로 없이 구릉이 많고, 들이 넓게 펼처져 있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으니 소금, 해산물, 곡물 등 풍부한 자원이 있는 풍요로운 땅과 내륙 깊숙이 발달한 하천을 이용해 상업과 문화가 활발하게 왕래했던 곳이기도 하여서 조선시대부터 중앙 권세가와 궁(왕)들이 차지하려고 다투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지리적인 이중환의 <택지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보령과 아산 일부지역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며 이곳은 서민 문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내포지역은 포구를 통해 문화의 유입이 활발한 유교, 불교, 천주교, 동학, 기독교 등이 유입되었고 근대 이후 사상적으로도 부르조아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활발히 유입되어 많은 역사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충남도는 서산, 홍성, 예산, 당진, 태안, 보령, 서천 전역과 청양, 아산 일부인 4153.63㎢를 내포 문화권으로 선정했는데, 이는 충남 전체의 48.3%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내포지역은 한국에서 당시의 한양(지금의 서울) 다음으로 천주교가 일찍 전래됐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일찍 전래된 것은 지리적인 조건가 관련이 있는데 이곳은 바다로 쉽게 중국과 연결되는 지역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쉬운 곳이었고, 양반과 유학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곳이 었기에 민에 대한 지배층의 통제가 다소 이완된 곳이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내포지역은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층과, 사기제조업, 도살업 등에 종사하는 장인·천민들도 상당히 많았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어서 어업에 종사하는 평민층이 많았는데, 바다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곳으로서 종교와 신앙에 대한 의존이 강한 곳이었기에 천주교는 바로 그 틈을 비집고 포교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로서는 중국으로부터 배로 접근하기 용이하다는 점, 내포지역 깊숙이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서 포교를 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유사시 배를 타고 탈출하거나 은신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여기에 성호 이익의 여주 이씨 일족 가운데 서학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는 이른바 ‘성호 좌파’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이 덕산지역에 거주하였다는 사실도 천주교 포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수용 확산된 것은 이존창의 힘이 크다.
이존창은 영세를 받은 후 1785년 고향인 내포에 돌아와서 1791년까지 머물면서 자기 자족과, 친척, 친구 등 수백여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79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체포당하게 되는데, 배교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난 이존창은 홍산으로 이주해 은밀하게 전교활동을 계속하였고, 다시 1795년 다시 체포당해 공주감영에 갇혔다가 풀려나고, 1795년 신해박해때 또 다시 체포되어 서울에서 심문받고 공주에서 처형되었다.
이존창이 떠난 이후 내포교회의 재건은 최신덕, 정산필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내포지역이나 차령산맥의 산간지역으로 들어가 옹기제조, 화전 및 담배경작, 소금 행상을 하며 살았다.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이후부터 1879년까지 88년간 7회에 걸쳐 발생했는데 수차에 걸친 박해로 순교한 내포지역 출신 신자는 남성 331명, 여성 103명으로 총 434명에 달하며, 이는 전국 순교자의 25%를 윗도는 숫자이다.
(신유박해 때 24명, 을해박해 때 13명, 기해·병오박해 때 25명, 병인박해 때 356명)
1850년대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가 일시 중단되자 전국의 신자 수는 크게 늘어 1861년 18,000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내포에서는 다불뤼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들이 선교를 수행했다. 1861년 베르뉘 주교가 조선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었고, 그 가운데 두 구역이 내포지역에 있었다. 오페르트 사건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무려 13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위의 프랑스 신부들이 모두 체포돼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됐고, 내포지역 100여 개 마을에서 37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우리는 내포지역의 관문이 아산 공세리 성당을 다녀왔다.
공세리성당이 위치한 1만여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곳에 조선조 성종 9년(1478년) 해운 세곡 해운창이 설치 운영되다가, 중종(1523년) 80칸의 창고가 지어지고 영조 38년(1762년) 폐창이 될 때까지 300년 정도 운영되었던 곳이었다.
공세리 성당은 1890년대에 설립된 120년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성당으로 1801년 에서 1873년 신유 병인 박해때 이 지역에서 순교한
32위의 순교자를 모신 순교 성지이며,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충남 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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