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역사․문화적 성격
- 임선빈(충남발전연구원 충청학연구부장) -
<목 차>
1. 머리말
2. 내포의 지명유래와 지역범위
3. 내포지역의 지형과 교통로
4. 내포지역의 지방제도와 통치구조
5.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징
6.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서해안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내포는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포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용어였다. 고려시대에 이미 내포라는 용어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서북지역을 지칭하는 일반화된 용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이후 내포는 우리의 뇌리에서 한동안 잊혀져 있었다. 심지어는 지리 교과서나 국어사전에서조차도 내포를 금강유역, 내포평야를 금강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대전․논산․강경 유역의 넓은 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이 한동안 잊혀지거나 왜곡되어 사용되었던 내포의 정확한 개념을 밝히고, 내포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문화적 성격을 개관하고자 한다.1)
먼저 제2장에서는 내포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내포의 지명유래와 그 지역범위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제3장에서는 내포지역 지형의 특징을 살핀 후, 문화권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다와 육지의 교통로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제4장에서는 내포지역의 지방제도와 통치구조를 다루고자 한다. 조선시대 홍주목을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의 행정체계와 함께, 해미의 병영과 오천의 수영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군사체계에 대해서도 다룰 것이다.
끝으로 제5장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징에서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지닌 내포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특히 해로를 통해 열려있던 내포지역에 고대의 불교문화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실학 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통시적으로 고찰하였다.
2. 내포의 지명유래와 지역범위
내포(內浦)의 사전적 의미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후미진 부분’을 뜻하며, 순수한 우리말로는 ‘안-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반명사가 언제부터 충청도[호서]의 서북부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어디를 지칭하는 것이었을까?
내포라는 용어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고려사≫에서는 내포라는 용어가 다음과 같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 丁酉에 全羅道都巡禦使 金횡이 漕船으로 內浦에 이르러 倭와 싸워 大敗하여 死者가 太半이었다.2)
㉯ 己巳에 倭가 內浦에 侵寇하여 兵船 30여 척을 부수고 여러 州의 租粟을 약탈하였다.3)
㉰ 邊光秀는 恭愍王 때에 兵馬使가 되었다. 國家에서 全羅 軍需의 漕運을 맡게 하였는데 倭에 막혀 通하지 못하므로 東北界의 武士를 뽑고 喬桐․江華․東西江의 戰艦 80여 척을 모조리 끌어모아 邊光秀 및 兵馬使 李善에게 命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漕運을 호위케 하였다. 代島에 이르니 內浦民으로 賊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도망해 와서 告하기를, "賊이 군사를 伊昨島에 숨겼으니 가히 가볍게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李善이 듣지 않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먼저 나아가니 賊이 2척으로써 맞아 거짓 물러가매 邊光秀 등이 쫓아가니 갑자기 賊의 50여 척이 와서 포위하였다. (하략)4)
㉱ 恭愍王 때에 왜가 나주에 침구하매 김횡이 (중략) 나가 全羅道 都巡禦使가 되었다. 그 때에 全羅道에 기근이 들었고 兵革까지 겹쳐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를 못하였는데 김횡이 割剝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고 軍粮을 減하여 그 半을 쓰며 여러 州의 漕船에 과세하여 다 집에 보내니 사방이 근심하였다. (중략) 漕船을 거느리고 內浦에 이르렀다가 倭와 더불어 만나 싸워 敗하매 士卒로 죽은 자가 半을 지났는데도 嬖幸들이 金횡의 뇌물을 받고 도리어 그를 칭찬하니 왕이 中使를 보내어 宮온을 下賜하고 맞이하여 위로하니 國人들이 憤恨하였다. (하략)5)
사료 ㉮와 ㉯는 고려사 세가의 기사로, 전라도도순어사 김횡의 조운선이 내포에 이르러 왜구에 대파 당한 사실과 왜가 내포에 침구하여 병선을 부수고 여러 고을의 조속을 약탈한 기록이다. ㉰와 ㉱는 열전의 기사로 ㉰는 변광수가 공민왕때에 병마사가 되어 전라도의 조운을 맡았다가 내포에서 왜구에게 대파 당한 기사이며, ㉱는 전라도도순어사 김횡의 조운선이 내포에서 대파 당했으나, 뇌물을 받은 폐행들의 칭찬으로 왕의 위로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사료 ㉱는 사료 ㉮와 동일한 사건을 전하는 것이다. 이상의 기사를 검토해 보면, 내포에 관한 기록이 모두 공민왕대의 기록이며, 전라도 조운선 및 왜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내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고려 공민왕대에 이르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지역은 전라도 조운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내포의 개념과 지역범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로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주목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에 의해서 저술된 ≪택리지(擇里志)≫의 팔도총론(八道總論)에서는 내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內浦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못[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斗入處]이다. 동쪽은 큰 들판[大野]이고 들 가운데에는 또 큰 개[大浦] 하나가 있으니, 이름이 由宮津으로,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 남쪽으로 오서산에 막혀 있는데 가야산으로부터 온 맥으로, 단지 동남쪽으로 공주와 통한다.
伽倻山의 앞뒤에 있는 10 고을을 함께 內浦라 한다. 地勢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壬辰과 丙子의 두 차례 난리에도 여기에는 미치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까운 곳에는 학질과 염병이 많다.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丘陵과 原濕(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그 중에서 보령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 고을 서편에 水軍節度使營이 있고 그 안에 영보정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여서 명승지라 칭한다. 북쪽은 결성․해미가 있고, 서쪽에는 큰 개[大浦] 너머에 안면도가 있다. 3邑은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또 북쪽에는 태안과 서산이 있다. 江華와 남북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작은 바다로 떨어져 있다. 서산 동쪽은 면천과 당진이며, 동쪽으로 큰 개[大浦]를 건너면 아산이다. 북쪽으로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기의 남양 및 화량과 비스듬하게 마주하고 있다. 이 4邑은 가야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가야산의 동쪽은 홍주와 덕산이다. 모두 유궁진의 서쪽에 있는데, 개[浦] 동쪽의 예산․신창과 더불어 뱃길로 한양과 통하는데 몹시 빠르다. 홍주의 동남쪽은 대흥과 청양인데, 대흥은 곧 백제의 임존성이다. 이 11 고을은 모두 오서산의 북쪽에 있다.6)
이 글의 전반부는 내포에 대한 총론격의 설명이고, 후반부는 내포의 각 고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각론에 해당한다. 전반부에서는 내포의 중심지는 가야산이고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을 내포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야산 앞뒤의 고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후반부에서는 가야산의 서쪽에 보령․결성․해미의 3고을, 가야산의 북쪽에 태안․서산․면천․당진의 4고을, 가야산의 동쪽에 홍주․덕산․예산․신창의 4고을이 있다고 하면서, 모두 11고을이 오서산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전반부의 10고을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무슨 연유일까? 필자는 내포가 오서산의 북쪽을 지칭한다고 하면, 오서산의 남쪽에 위치한 보령은 내포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나머지 10고을이 내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위의 글에서는 내포의 중심지로 가야산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유궁진(由宮津)에 대해 중시하고 있다. 즉 가야산의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판 가운데의 큰 포구[大浦]가 유궁진인데, 유궁진은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홍주․덕산․예산․신창에서 뱃길로 한양을 갈 때 이 유궁진을 이용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내포(內浦)의 ‘浦’가 바로 이 유궁진을 지칭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사실 최남선도 '內浦라 함은 忠淸道 西南隅의 伽倻山脈을 環繞하야 잇는 여러 골을 시방 揷橋川의 上流, 由宮津의 안녁헤 잇다 해서 니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7) 이 유궁진은 ≪대동지지≫의 돈곶포(頓串浦), ≪증보문헌비고≫의 융진(戎陣)을 지칭한 것으로,8) 유궁진의 하류에는 범근내포가 있었다.9) 유궁진은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내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다음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조선초기에 내포는 범근내포를 중심으로 한 아산만의 조세를 거두어 들이던 곳[收租處]을 지칭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정부에 명하여 전라도 米穀을 육지로 운송[陸轉]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정부에서 글을 올렸다[上書].
“충청도 각 고을[各官]의 田租는 佃客으로 하여금 수송하되, 內浦와 金遷에 이르게 하고, 전라도 完山 領內 동북에 있는 각 고을은 수송하여 淸州 領內의 각 고을에 이르게 하고, 완산 서남 영내에 있는 각 고을은 수송하여 公州․洪州 영내의 각 고을에 이르게 하고, 南原․順天 영내에 있는 각 고을은 수송하여 완산 동북 영내의 각 고을에 이르게 하고, 羅州․光州 영내에 있는 각 고을은 수송하여 완산 서남 영내의 각 고을에 이르게 하되, 경상도 역시 이 例에 의하여 차례대로 轉輸하면, 노정이 모두 3일 동안의 거리에 불과하고, 왕복하는 데 머무는 것이 모두 10일에 불과하게 되어, 전객이 직접 수납하는 폐단을 일거에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0)
위의 기사는 여말선초에 해로를 통한 조운이 왜구의 출몰과 선박의 표몰로 인하여 손실이 심해지자, 종전의 수운을 육운으로 바꾸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충청도 각 고을의 전조를 전객이 직접 수송하되, 내포(內浦)와 금천(金遷)까지 수송하도록 하자고 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포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조선초기의 지리지에서는 이 내포가 어디를 지칭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내포와 금천이 나란히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지명은 같은 성격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확인 가능한 금천의 성격을 검토함으로써 내포의 개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금천(金遷)은 연천(淵遷)이라고도 하였으며, 충주의 서쪽 10리에 있는 남한강가의 수조처(收租處)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용된 내포의 개념도 금천과 같은 충청도의 수조처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종 7년 충청도 감사의 계에 의하면, 당시 충청도의 녹전(祿轉)과 선납미(先納米) 수납처로 도내 면천 범근천, 아산 공세곶, 직산 경양포, 충주 금천․앙암, 경기도 여흥의 우음안, 천녕의 이포 등이 제시되고 있다.11)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충청도의 수조처로 다음과 같이 모두 8군데를 기록하고 있다.12)
<표 1> 조선초기 충청도의 수조처와 조운로
수조처 |
위치 |
수조고을(고을수) |
조운로 |
淵遷 |
忠州 서쪽 10리 |
忠州․丹陽․淸風․槐山․延豊․堤川․永春․陰城 등 (8) |
楊津 - 仰巖 - 서울 (水路 2백 60리) |
仰巖 |
忠州 서쪽 60리 |
忠州․丹陽․淸風․槐山․延豊․堤川․永春 등 (7) |
楊津 - 驪興 - 서울 (水路 2백 20리) |
亐音安浦 |
京畿 驪興 동쪽 10리 |
沃川․永同․黃澗․靑山․報恩․靑安 등 (6) |
驪江 - 서울 (水路 2백 10리) |
推乎浦 |
驪興 서쪽 1리 |
靑安․陰竹 (2) |
驪江 - 梨浦 - 서울 (水路 1백 94리) |
利浦 |
京畿 川寧縣 동쪽 5리 |
竹山․鎭川 (2) |
(水路 1백 60리) |
慶陽浦 |
稷山縣 서쪽 1리 |
稷山․平澤 (2) |
貢稅串 - 西海 - 西江 (水路 5백 40리) |
貢稅串 |
牙山縣 서쪽 8리 |
牙山․淸州․木川․全義․燕岐․溫水․新昌․恩津․連山․懷德․公州․定山․懷仁․天安․鎭岑․尼山․文義 등 (17) |
犯斤川 - 西海 - 西江 (水路 5백 리) |
犯斤川 |
沔川 동쪽 30리 |
沔川․林川․韓山․舒川․藍浦․庇仁․鴻山․洪州․泰安․瑞山․海美․康津․德山․禮山․靑陽․保寧․結城․大興․石城․扶餘 등 (20) |
大津 - 西海 - 西江 (水路 5백 10리) |
이 가운데 충주와 경기도에 위치한 수납처인 연천(淵遷)․앙암(仰巖)․울음안포(亐音安浦)․추호포(推乎浦)․이포(利浦) 등은 모두 남한강 줄기에 해당하는 곳이고, 범근천(犯斤川)․공세곶(貢稅串)․경양포(慶陽浦) 등은 모두 아산만에 위치한 것이다. 따라서 금천(金遷[淵遷])이 남한강가의 수조처인 만큼 인용문의 내포는 남한강 유역의 수조처가 아닌 아산만에 있었던 수조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내포는 삽교천을 중심으로 한 범근천, 공세곶, 경양포 등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3곳의 수조처 가운데에서도 조선초기에는 20고을의 세곡이 모이는 범근천이 중심지였다.13)
그런데 이와 같은 아산만의 수조처를 중심으로 한 삽교천 일대를 지칭하는 협의의 내포와 가야산 자락의 10여 고을을 포함하는 광의의 내포가 반드시 전후의 시차를 두고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조선초기부터 내포는 아산만의 수조처가 아닌, 충청도 서북부의 여러 고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다음의 기사를 보자.
忠淸道觀察使 金礪石이 바닷조개[海蛤] 백 개를 바쳤다. 그 이름은 江瑤柱인데, 庇仁․內浦 등지에서 생산된다. 날씨가 추울 때에 海口의 潮水 머리에 물이 줄어들고 진흙이 드러난 곳에서 나는데, 혹시 나기도 하고 안나기도 하며, 그 맛은 보통 조개[蛤]와 같지 아니하다.14)
위의 기사는 충청도 관찰사가 바닷조개 강요주를 성종에게 진상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외방(外方-오늘날의 지방에 해당)의 진상은 원칙적으로 도 단위가 기준이 되었으므로, 그 책임은 관찰사와 병․수사에게 주어져 있었다. 충청도관찰사가 강요주를 진상하였는데, 당시에도 귀한 물품이었으므로 실록에까지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이 강요주가 생산되는 곳이 진흙이 드러나는[갯벌] 비인과 내포 등지[庇仁內浦等處]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내포는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에 의하면, 충청도에서 강요주가 생산되는 곳은 보령․남포․비인․홍주․결성․당진 등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아산만의 수조처에 해당하는 고을에서는 강요주가 생산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내포의 개념은 강요주가 생산되는 고을 가운데 비인을 제외한 5개의 고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내포가 아산만의 수조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내포등처 10여고을(內浦等處十餘官)’이라는 표현이 세종조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15)
조선후기에는 내포가 다음과 같이 가야산 앞뒤의 10고을보다 더 넓은 지역범위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영의정 李)光佐가 아뢰기를, “湖西 內浦 18개 고을[湖西內浦十八邑]이 이미 赤地로 판명되었으니, 청컨대 朴師昌을 御史로 파견해 떠도는 백성을 安集시키고, 守令을 廉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6)
위의 기사에서는 호서 내포 18개 고을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한 호서 내포의 18 고을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우리는 먼저 조선후기 홍주진관(洪州鎭管)에 속한 18개 군현을 떠올릴 수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 홍주진관(洪州鎭管)에는 서천․면천․서산․태안․온양․평택․홍산․덕산․청양․남포․비인․결성․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 등 모두 18개 군현이 속해 있었다.17) 사실 홍주는 조선초기부터 충청도 서부지역의 계수관 고을로서,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령으로 정3품 목사가 파견되고 있었고, 홍주목사는 홍주진의 병마첨절제사를 겸대(兼帶)하였으며, 홍주진관에 소속된 고을은 홍주 외에 평택․아산․온양․신창․면천․당진․해미․서산․태안․덕산․예산․대흥․결성․청양․보령․남포․비인․홍산․서천 등이었다.18)
홍주진관이 내포와 연계되어 언급된 사례는 이미 선조 27년의 기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비변사가 선조에게 외방 진관의 법에 대해 아뢰는 과정에서 ‘공주(公州) 진관의 법이 잘 다스려질 경우 금강(錦江) 일대는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며, 홍주(洪州) 진관의 법이 잘 다스려질 경우 내포연해등지(內浦沿海等地)를 모두 방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19)
한편, 오늘날의 천주교에서는 아산․온양․신창․예산․대흥․면천․당진․덕산․해미․홍주 등지를 상부내포(上部內浦)라고 하고, 태안․서산․결성․보령․청양․남포․비인․서천․한산․홍산 등지를 하부내포(下部內浦)라고 부르며20), 심지어는 금강가에 위치한 공주까지도 내포교회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내포의 개념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 아니다. 처음 내포지방에 전래된 천주교가 점차 공주를 비롯한 내륙으로 확산된 상황의 반영으로 추측된다.21)
3. 내포의 지형과 교통로
내포지방을 다니다 보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 위에 우뚝 솟은 가야산자락이 멀리에서도 보인다. 가야산의 정상(해발 677m)에서는 당진 북쪽의 바다로부터 서쪽의 천수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니, 실제로 이 일대는 모두 가야산의 자락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차령산맥이라 부르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성주산에서 휘돌아 북주하여 이루어 내는 가야정맥(伽倻正脈)은 가야산에 이르러 가장 우뚝 솟아나 태안반도에 군림한다. 이 가야산은 우리말로 개산(갯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을 우리는 모두 이렇게 불렀다. 합천의 가야산이나 나주의 가야산 등이 모두 그렇다.)이던 것을 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석가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루었던 곳이 가야 즉 붓다가야이므로 가야 근처에 있던 가야산(Gayãśīrṣa, 象頭山)의 이름을 옮겨다 불교식으로 표기하여 성역화(聖域化)한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가야(Gayã)는 코끼리라는 뜻이니 가야나 상왕이나 같은 의미라서 처음에는 함께 쓰던 이름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가야니 상왕이니 하는 구분이 없이 함께 써 왔다. 그런데 조선시대로 들어와 억불정책의 결과로 불교지식이 상식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가야와 상왕이 서로 다른 의미로 오해되어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뒷날 관행으로 가야산 연봉 중 북쪽 봉우리들은 상왕산이라 하고 남쪽은 가야산이라 구별하게 되었다. 가야산 남쪽 계곡에 역시 가야사(伽倻寺)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2)
내포지방의 중심지에 위치한 가야산은 지형적 특징에 입각한 전통시대의 지리인식에 의하면,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속한다.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알기 쉽게 만든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에 의하면,23)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근원으로 하여 갈라져 나온다. 이 백두대간의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되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청주의 상당산성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돌아 죽산의 칠현산에서 다시 나뉘어 북으로 한남정맥(漢南正脈), 남으로 금북정맥이 된다.
금북정맥은 칠현산에서 안성의 청룡산(靑龍山)을 거쳐 서쪽으로 흘러 직산의 성거산(聖居山) - 망일치(望日峙) - 월조산(月照山) - 연기의 의랑치(義郞峙) - 천안과 공주의 차령(車嶺) - 쌍령(雙嶺) - 광덕산(廣德山) - 각흘치(角屹峙)에서 남북으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 아산에서 그치고, 본 줄기는 청양의 사자산(獅子山) - 우산(牛山) - 구봉산(九峯山) - 홍주(洪州)와 홍산(鴻山)의 백월산(白月山) - 성대산(星台山)에서 다시 북으로 굽어서 오서산(烏栖山)으로 이어진다. 오서산에서는 다시 작은 줄기가 갈라져서 보령의 진당산(鎭堂山)으로 뻗어서 바다에서 그친다. 오서산의 본 줄기는 결성의 보개산(寶盖山) - 월산(月山) - 수덕산(修德山) - 가야산(伽倻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한 줄기는 면천으로 뻗어 마산(馬山) - 몽산(蒙山) - 신엄산(申菴山) - 녹운치(綠雲峙)에서 그친다. 본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서 서산의 성국산(聖國山)에서 다시 나뉘어지는데, 북으로 뻗어서 대산(大山) - 평신진(平薪鎭)에서 그치고, 서로 뻗은 줄기는 서산의 팔봉산(八峰山) - 태안의 백화산(白華山) - 지령산(知靈山) - 안흥진(安興鎭)에서 그치며, 남으로 뻗은 줄기는 안면도로 이어져 ‘영목’[要兒梁]에서 그친다.24)
최완수는 금북정맥의 본 줄기가 오서산에서 북진하면서, 서쪽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지는 많은 지맥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복잡한 대소반도가 형성되고 그 산맥 사이를 따라 크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게 되는데, 이곳 지형이 전체적으로 완만한 데다가 바다의 조석간만의 차가 8-9m에 이르는 큰 격차를 보이므로 시내마다 거의 모두 갯물이 역류하여 중하류 지역은 바다와 직결되므로 수 십리 혹은 백 여리 물길이 내륙으로 깊이 들어오며 바다물을 끌어 들이기 때문에, 곳곳에 안개[內浦]가 생길 수 밖에 없어 이 지역 전체를 안개 즉 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25) 지금도 태안반도 일대에서는 안개[內浦]라는 지명이 많이 찾아진다.26)
또한 온양의 각흘치에서 남진해 오던 금북정맥의 본 줄기가 오서산에서 휘돌아 가야산으로 치달려 감으로써,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물줄기는 북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가는데, 바로 이 내의 본줄기인 삽교천(옛 이름은 宣化川)은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유역 평야가 가장 넓어 이 지역을 내포 중의 내포로 손꼽는다고 하였다.27)
내포지역은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뱃길과 포구가 발달하였다. 육로교통이 발달한 오늘날과는 달리 수로교통이 중요했던 전통시대에는, 산은 길을 막고 물은 길을 이어 주었다. 이중환은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조에서 내포지방에서는 아산의 공세호와 덕산의 유궁포, 홍주의 광천, 서산의 성연을 유통이 활발한 포구로 들고 있다.
특히 삽교천 주변에는 조선후기에 많은 포구와 나루가 형성되어 있었다. 몇 종의 지지에서 확인되는 삽교천변의 포구와 나루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28)
≪신증동국여지승람≫ : 堂浦(아산현), 井浦渡․獐浦․犬浦(신창현), 狐頭浦(예산군), 犯斤乃浦(면천군) / 大迺山津․介浦津․市津(아산현), 井浦渡(신창현)
≪여지도서≫ : 市浦․唐浦(아산현), 獐浦․大浦․加野浦․丹池浦(신창현) / 大迺山津․大角津(아산현), 井浦渡(신창현)
≪대동지지≫ : 中防浦․犬浦․白石浦․屯浦․堂浦․市浦․牛坪浦(아산), 獐浦․中防浦․犬浦(신창), 狐頭浦(예산), 江門浦(면천), 九萬浦․頓串浦(덕산) / 頓串津(덕산현)
한편, ≪증보문헌비고≫권34 여지고 관방 해방조에는 충청도 지역의 주요 포구로 56개소가 거론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아산부터 결성까지의 포구는 44개소에 달한다.29)
아산 : 공세곶포, 당포, 시포, 단장포
홍주 : 대진포, 전선창, 안면곶, 원산도, 석비포
면천 : 전선창, 대진포, 창택곶, 가리도
당진 : 당진포, 채원포, 맹곶
서산 : 평신진, 왜현포, 남곶,위곶, 안면곶, 요견량, 파지도, 대산곶, 백사정, 창포
태안 : 안흥진, 소근포, 부포, 안지영산곶, 대소산곶, 굴포, 안흥량, 이산곶, 신곶, 백사정
결성 : 동산포, 석곶포, 장포, 모산당포
내포의 서해안으로는 일찍부터 삼남의 조운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충청도 이남의 세곡을 경도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령 앞바다 - 태안의 안흥량 - 당진의 난지도 서쪽을 경유해야만 했다. 그런데 안흥량에는 암초가 많고, 좁은 수로로 조류가 빠르며, 간만의 차가 커서 선박의 운항이 어려웠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친 운하개착을 시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인종 12년과 공양왕 3년에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의 운하[漕渠] 개착을 시도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시대에는 태종조부터 다시 태안조거의 굴착공사가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중종조에는 의항운하가 굴착되어 일시적이나마 사용되었다. 인조조에는 보다 굴착하기 용이한 안면곶을 끊어 안면도를 섬으로 만들면서 일명 백사수도(白砂水道)라는 운하의 완성을 보았다. 그 결과 안면도의 내해인 적돌강의 배가 직접 서해로 통하게 되어 안면도를 도는 200여리의 뱃길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강과 삼남을 연결하는데 최대의 장애처였던 안흥량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부근의 조운로를 지키기 위하여 숙종 원년(1675)에 안흥량에 방어영을 설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해의 조운로는 서천 연도 동쪽 - 보령 원산도와 고대 삽시도 사이 - 서산 안흥진․가의도 사이 - 당진 난지도 - 부천 영흥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신경준의 ≪도로고≫해로조에는 서울과 호남지역으로 연결되는 이 부근의 해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30)
대난지도 - 소난지도 - 황금도 - 만대도 - 독진포 - 소근진 - 갈두도 - 안흥량 - 마도 - 죽도 - 경도 - 안면도 - 항개초외도 - 원산도 - 눌도 - 효자문도 - 희도 - 죽도 - 마량진
육로는 내포지방이 서해안으로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역로의 중요간선로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전라도에 이르는 중요 간선로가 충청도에서는 (경기)화천 - 성환 - 신은 - 금제 - 광정 - 일신 - 경천 - 양재 - 삼례(전라)의 길을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내포지방은 차령에서 성주산․오서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에 의하여 주요 역로에서 비켜나 있었다. 이는 ≪택리지≫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내포지방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시대 서울에서 보령의 충청수영에 이르는 주요 도로망은 소사(직산, 평택 동10리) - 평택 - 탁천 - 요로원(아산) - 어래현 - 곡교천 - 신창 - 신례원(예산) - 인후원(홍주) - 광천 - 충청수영(보령) - 보령 - 남포 - 비인의 길이었으며, 여기에 탁천에서 요로원과 아산으로 갈리는 길, 요로원에서 어래현과 온양으로 갈리는 길, 신례원에서 인후원과 예산, 서천 - 덕산 - 해미 - 서산 - 태안, 대흥 - 청양으로 갈리는 길, 인후원에서 광천과 홍주 - 결성으로 갈리는 길, 서천에서 덕산과 면천 - 당진으로 갈리는 길이 있었다.
내포지방 내에서는 가야산을 제외하면 높은 산이 별로 없었으므로, 수로와 육로를 통한 교통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내포지방에서 충청도관찰사영에 해당하는 공주와의 통교는 예산에서 차령(車嶺, 車踰嶺, 차동)고개를 넘어 유구역 - 단평역 - 웅진 - 공주로 통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이는 온양의 각흘치에서 오서산까지 남진하는 금북정맥의 높은 산줄기가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포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는 아산만이 내륙 깊숙히 만곡되어 있고 삽교천의 하구가 넓었으므로, 삽교천의 중․상류에 위치한 다리나 나루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었으므로, 주로 홍주목의 대진(大津, 현재의 당진군 송악면 한진나루)을 이용하였다. 이 대진(大津)의 포구에는 왜구가 해안에 자주 출몰하던 여말선초에는 수군 만호가 설치되어 있었으며(조선초기 세조조까지 존속),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만호 휘하에 병선 13척, 선군 79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도비지≫에서는 대진을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는데,31)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에 의하면 이곳에서 평택의 포승면 만호리 포구에 이르는 뱃길이 내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큰 길이었다. 사실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의 산성으로 몽진할 때에 조정에서는 ‘대진(大津)을 건너 내포(內浦)로 갈 것’을 고려하기도 했었으니,32) 중앙에서는 대진나루가 내포로 가는 길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도 ‘대진(大津)의 이남(以南)을 통칭하여 내포(內浦)’라고 했다.33)
4. 내포지역의 지방제도와 통치구조
조선시대 내포지역의 중심고을은 홍주목이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는 홍주목사가 내포의 다른 고을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고을의 위격에 관계없이 모두 충청도관찰사의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즉 충청도에 파견된 관찰사가 도내 모든 고을을 관할하고, 고을에 파견된 수령 상호간에는 행정적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병렬적인 관계였다.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은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대체로 54고을로 구성되어 있었고,34) 이들 각 고을에 목민관을 비롯한 외관이 파견되고 있었다. ≪경국대전≫과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전기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의 4고을에 목사․판관․교수가 파견되고 있었고, 임천․단양․청풍․태안․한산․서천․면천․천안․서산․괴산․옥천․온양 등 12고을에는 군수와 훈도가 파견되었으며, 문의에는 현령과 훈도가 파견되고, 그 외 37고을에는 현감과 훈도가 파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외관의 파견은 조선후기에 다소 변동이 있었으니, 우선 교수․훈도와 같은 향교의 교관직이 더 이상 파견되지 않고 있다. 사실 향교의 교관직은 조선전기부터 적임자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었고, 보완책으로 한때 제독관제도가 실시된 적도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관학교육기구인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더욱 쇠퇴하고, 서원․서당․정사 등 사학기관이 발달하자, 마침내 향교의 교관을 감원하기에 이른다. 향교의 교관 및 제독관 제도가 조선후기 언제까지 지속되었는가는 명확하지 않으나, 174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교수․훈도가 모두 감원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 등 목사가 파견된 고을에 함께 파견되던 판관도 관찰사가 목사직을 겸임하던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혁파되고 있다.
한편, ≪여지도서≫에서는 내포지역의 고을 가운데 대흥현이 군으로 승격되어 있다. 조선전기에 현감이 파견되던 고을인 대흥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1681년(숙종 7)의 일로, 승격사유는 현종의 태실이 대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전회통≫에는 덕산이 현감파견고을에서 군수파견고을로 승격되어 있다. 덕산의 승격사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순조의 태가 덕산의 가야산 아래 명월봉 태봉소에 봉안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충청감영과 충청도의 각 고을에 파견되던 동반직 외관을 ≪경국대전≫․≪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대전회통≫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표 2>와 같다.35)
<표 2> 조선시대 충청도의 고을별 외관 파견 규정
|
≪경국대전≫ |
≪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
≪대전회통≫ |
비고 |
監營 |
관찰사, 도사, 심약, 검률 |
관찰사, 도사, 심약, 검률 |
관찰사(文二品), 도사(文六品), 심약, 검률, 화사 |
관찰사․도사․심약․검률 |
|
忠州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 판관, 교수 |
충원현감(蔭四品) |
목사 |
충북 |
淸州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或文或蔭正三品) |
목사 |
충북 |
公州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 판관, 교수 |
판관(蔭五品) |
(목사)․판관 |
공주시 |
洪州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 판관, 교수 |
목사(文正三品) |
목사 |
홍성군 |
林川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四品) |
군수 |
부여군 |
丹陽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四品) |
군수 |
충북 |
淸風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부사(文或蔭三品) |
도호부사 |
충북 |
泰安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文武交遞從四品) |
군수 |
태안군 |
韓山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從四品) |
군수 |
서천군 |
舒川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文武交遞四品) |
군수 |
서천군 |
沔川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從四品) |
군수 |
당진군 |
天安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文蔭皆四品) |
군수 |
천안시 |
瑞山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文武交遞從四品) |
군수 |
서산시 |
槐山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四品) |
군수 |
충북 |
沃川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蔭從四品) |
군수 |
충북 |
溫陽 |
군수, 훈도 |
군수, 훈도 |
군수(正四品)-보유편 |
군수 |
아산시 |
文義 |
현령, 훈도 |
현령, 훈도 |
현령(蔭六品) |
현령 |
충북 |
鴻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蔭六品) |
현감 |
부여군 |
堤川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六品或蔭六品) |
현감 |
충북 |
德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蔭武六品) |
군수 |
예산군 |
平澤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경기 |
稷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南俱六品) |
현감 |
천안시 |
懷仁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충북 |
定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보유편 |
현감 |
청양군 |
靑陽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或文六品) |
현감 |
청양군 |
延豊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或文六品) |
현감 |
충북 |
陰城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충북 |
淸安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보유편 |
현감 |
충북 |
恩津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논산시 |
懷德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대전 |
鎭岑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대전 |
連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논산시 |
尼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노성현감 |
논산시 |
大興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군수(文蔭武四品) |
군수 |
예산군 |
扶餘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六品) |
현감 |
부여군 |
石城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官從六品) |
현감 |
부여군 |
庇仁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武蔭六品) |
현감 |
서천군 |
藍浦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武官六品) |
현감 |
보령시 |
鎭川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武蔭交遞六品) |
현감 |
충북 |
結城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六品) |
현감 |
홍성군 |
保寧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六品) |
현감 |
보령시 |
海美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武六品) |
현감 |
서산시 |
唐津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南六品) |
현감 |
당진군 |
新昌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官六品) |
현감 |
아산시 |
禮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官六品) |
현감 |
예산군 |
木川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門蔭交遞六品) |
현감 |
천안시 |
全義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蔭六品) |
현감 |
연기군 |
燕岐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연기군 |
永春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文蔭六品) |
현감 |
충북 |
報恩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군수 |
충북 |
永同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或文) |
현감 |
충북 |
黃澗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충북 |
靑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충북 |
牙山 |
현감, 훈도 |
현감, 훈도 |
현감(蔭六品) |
현감 |
아산시 |
(굵은 글씨는 내포지역 고을에 해당)
≪여지도서≫ 관직조 기사에서는 조선후기 수령의 입사유형에 대하여 기준을 정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내포지역의 수령 가운데 홍주목사(정3품)․결성현감(6품)․보령현감(6품) 등은 문과(文科) 출신 수령이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해미현감(6품)은 무과(武科) 출신, 면천군수(종4품)․평택현감(6품)․신창현감(6품)․예산현감(6품)․아산현감(6품) 등은 음관(蔭官)이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태안군수(종4품)․서천군수(4품)․서산군수(종4품)․남포현감(6품)은 문무교차과(文武交差窠), 홍산현감(6품)․청양현감(6품)․당진현감(6품)은 문음교차과(文蔭交差窠), 대흥군수(4품)․덕산현감(6품)․비인현감(6품) 등은 문음무교차과(文蔭武交差窠)에 해당하였다(≪여지도서≫에는 온양군수의 입사성분이 적혀있지 않지만, 다른 읍지를 통해 확인해 보면 음직에 해당). 이는 내포지역 고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문과와 무과출신 수령이 많이 부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홍주목사와 결성현감, 보령현감은 문과출신만 부임하는 것이 이채롭다. 해미현감으로 무과출신 수령이 부임하는 것은 영장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표 3> 조선후기 수령의 입사유형 분포(%)
|
文 |
武 |
蔭 |
文․武 |
文․蔭 |
文․蔭․武 |
계 |
내 포 |
3(15) |
1(5) |
6(30) |
4(20) |
3(15) |
3(15) |
20(100) |
충청도 |
3(6) |
1(2) |
28(52) |
4(7) |
14(26) |
4(7) |
54(100) |
전 국 |
30(9) |
56(17) |
103((31) |
62(19) |
62(19) |
18(5) |
331(100) |
조선시대 내포지역의 지방군제는 어떠하였을까? 조선초기에 정비된 진관체제에 의하면,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가 주진에 있으면서 도내 각 진관의 군사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아래 거진에는 부윤․목사․부사가 절제사․첨절제사 등을 겸하여 군사조직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말단의 진은 군수․현령․현감 등이 동첨절제사․절제도위 등을 겸하였고, 특수지역에는 만호를 두었다.
충청도에는 육군으로 종2품 병마절도사(병사)가 2명이었는데,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전임 병사는 1명만 파견되었다. 또한 종3품의 병마우후가 1명 파견되어 병마절도사를 보좌하였다. 전임 병사가 근무하던 병마절도영(병영)은 1402년(태종 2)에 처음 덕산에 영을 설치하였다가, 1418년(태종 18)에 해미로 이설하였고, 1651년(효종 2)에 청주읍성 안으로 이설하였다.
목사가 파견되던 고을인 충주․청주․공주․홍주는 거진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진관이 설치되어 종3품직인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는 목사들이 진관을 관할하였는데, 내포에 해당하는 홍주진관의 경우 병마동첨절제사(종4품)는 군수에 해당하는 서천․서산․태안․면천․온양의 수령이, 병마절제도위(종6품)는 홍주진과 평택․홍산․덕산․청양․대흥․비인․결성․남포․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의 수령(현감)이 겸직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영장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도에는 홍주(전영), 해미(좌영), 청주(중영), 공주(우영), 충주(후영) 등에 5영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내포지역에 해당하는 홍주에는 정3품의 무신이 전영장으로 파견되었고, 해미의 경우에는 해미현감이 종2품직인 영장토포사를 겸하였다.36)
수군도 육군의 진관체제에 따라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각 도의 수군절도사(수사) 밑에 첨절제사․동첨절제사 등이 있고, 각 특수 포구에는 전담 무장이 배치되었다. 충청도에는 정3품 수군절도사가 2명 있었는데, 1명은 관찰사가 겸하고 1명은 전임수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수군우후(정4품)가 1명 파견되었다. 전임수사가 근무하는 수군절도영(수영)은 보령현 서쪽 20리에 위치하였다.37)
수군 거진은 소근포진과 마량진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종3품 수군첨절제사가 각각 1명씩 파견되었다. 소근포진은 일명 후근이포(朽斤伊浦)라고도 하는데, 태안군의 서쪽 33리에 있었으며, 좌도수군첨절제사영이 있고, 관할하는 곳은 당진포와 파지도이다.38) 마량진은 우도수군첨절제사영이 있었으며, 관할하는 곳은 서천포이다. 처음에는 남포현의 서쪽 33리에 있었으나,39) 후에 비인으로 이설되었다.40) 당진포, 파지도, 서천포 등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가 각각 1명씩 파견되었다.
조선시대 내포지방의 중심고을이었던 홍주목은, 19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정되어 종전의 8도제가 23부제로 바뀌었을 때에는 관찰사가 파견되는 홍주부(洪州府)가 되어, 다음과 같은 주변의 22개군을 관할하기도 하였다.41)
洪州郡․結城郡․德山郡․韓山郡․舒川郡․庇仁郡․藍浦郡․保寧郡․林川郡․鴻山郡․瑞山郡․海美郡․唐津郡․沔川郡․泰安郡․大興郡․靑陽郡․禮山郡․新昌郡․溫陽郡․牙山郡․定山郡
홍주부 소속 고을인 이 22개군은 종전의 홍주진관 소속 고을인 20개의 고을 가운데, 평택이 공주부로 이관되고 한산․임천․정산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이 23부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음해인 1996년(고종 33)에 다시 23부제가 13도제로 바뀌면서 충청도 지역은 종전의 3부가 충청남․북도로 바뀌었다.
한편, ≪여지도서≫의 관직조에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외관은 아니지만, 해당 고을의 관속들이 제시되어 있다. 좌수․별감․감관․군관․아전․영리․지인․사령․군뇌․관노․관비 등인데, 내포의 각 고을에 설치되어 있던 관속을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표 4> 조선후기 내포지역 각 고을의 관속
고을명 |
座首 |
別監 |
監官 (倉監) |
軍官 |
衙前 (鄕吏․假吏) |
營吏 (鎭吏) |
知印 (통인) |
使令 (나장) |
군뇌 |
官奴 |
官婢 |
비 고 |
홍주목 |
1 |
4 |
|
50 |
45 |
|
22 |
21 |
|
9 |
8 |
홍성군 |
(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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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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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6 |
|
20 |
|
|
|
태안군 |
1 |
4 |
|
50 |
53 |
|
18 |
24 |
|
15 |
15 |
태안군 |
서천군 |
1 |
2 |
|
50 |
30 |
|
15 |
15 |
|
2 |
3 |
서천군 |
면천군 |
1 |
2 |
(2) |
30 |
34 |
15 |
20 |
22 |
|
12 |
11 |
당진군 |
서산군 |
1 |
3 |
|
40 |
35 |
|
21 |
28 |
|
13 |
11 |
서산시 |
온양군 |
1 |
2 |
|
|
|
|
13 |
16 |
|
11 |
12 |
아산시 |
홍산현 |
1 |
1 |
1 |
30 |
32 |
|
24 |
21 |
|
15 |
11 |
부여군 |
덕산현 |
1 |
2 |
|
8 |
40 |
|
22 |
27 |
|
16 |
12 |
예산군 |
평택현 |
1 |
2 |
|
30 |
18 |
|
16 |
21 |
|
23 |
26 |
경기 |
청양현 |
1 |
1 |
1 |
30 |
20 |
|
12 |
11 |
|
2 |
4 |
청양군 |
대흥군 |
1 |
2 |
|
20 |
53 |
|
15 |
29 |
|
11 |
9 |
예산군 |
비인현 |
1 |
2 |
|
9 |
20 |
|
(11) |
6 |
|
2 |
3 |
서천군 |
남포현 |
1 |
2 |
2 |
10 |
16 |
|
6 |
7 |
|
13 |
5 |
보령시 |
결성현 |
1 |
2 |
|
30 |
|
|
15 |
15 |
|
11 |
10 |
홍성군 |
보령현 |
1 |
1 |
1 |
10 |
10 |
|
7 |
8 |
|
9 |
8 |
보령시 |
해미현 |
1 |
2 |
|
8 |
15 |
|
14 |
6 |
30 |
5 |
4 |
서산시 |
당진현 |
1 |
2 |
|
20 |
30 |
|
14 |
16 |
|
25 |
20 |
당진군 |
신창현 |
1 |
2 |
|
20 |
20 |
|
11 |
9 |
|
9 |
10 |
아산시 |
예산현 |
1 |
2 |
|
30 |
20 |
|
12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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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7 |
예산군 |
아산현 |
1 |
2 |
|
30 |
(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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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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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9 |
아산시 |
오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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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치(보령시) |
조선시대 충청도의 역참조직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6도 71역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내포지역과 관련 있는 역도는 금정도와 시흥도이다.42) 시흥도(時興道)의 중심역은 시흥역(時興驛,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으로 역승(驛丞)이 부임하였으며, 관할범위는 아산 - 온양 - 신창 - 예산 - 덕산에 이어지는 역로와, 신창 - 면천 - 당진에 이어지는 역로였고, 이에 속하는 역은 창덕(昌德, 아산시 신창면 창압리 역말), 일흥(日興,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급천(汲泉, 예산군 삽교읍 역리), 순성(順城,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 역말), 흥세(興世, 당진읍 용연리 역말), 장시(長時, 아산시 영인면 역리), 화천(花川,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 등 7개역이었다. 금정도(金井道)의 중심역은 금정역(金井驛, 청양)으로 여기에도 역승이 부임하였고, 관할범위는 청양 - 대흥의 역로와, 청양 - 결성 - 홍주 - 보령 - 해미 - 서산 - 태안 지역으로 연결되는 역로였으며, 이에 속하는 역은 광시(光時,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해문(海門,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청연(靑淵, 보령시 주포면 관산리 역말), 세천(世川, 홍성군 홍동면 원천리), 용곡(龍谷,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몽웅(夢熊,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하천(下川,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풍전(豊田, 서산시 인지면 풍전리)의 8개역이었다. 금정도와 시흥도의 소속역은 모두 소로(小路) 또는 소역(小驛)에 속하는 역들이었다. 역도(驛道)에 부임하던 역승(종9품)은 중종 30년(1535) 역승이 완전히 폐지되는 조치에 의하여 종6품의 찰방(察訪)으로 바뀌고 있다.
그 후 ≪속대전≫에 의하면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그 곳에 속했던 속역(屬驛)들이 모두 금정도에 이속되었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광해군 6년(1614)에는 금정도의 본역이 청양의 금정역에서 홍주목의 용곡역으로 이설되었다.43)
5.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징
조선시대 내포라는 용어가 지칭하던 지역범위는 ① 내포 중의 내포라고 할 수 있는 삽교천 유역, ②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언급한 가야산 주위의 10여 고을, ③ 조선시대 이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던 홍주목과 관련한 홍주진관 소관의 20여 고을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일반화된 개념은 가야산 주위의 10여고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동으로는 죽산의 칠현산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는 금북정맥의 본줄기에 가로막혀 충청도의 내륙지방과 격리되어 있고, 남으로는 오서산에서 보령의 진당산으로 갈라지는 금북정맥의 작은 갈래에 의해 구분된다. 서로는 서해라는 큰 바다를 끼고 있으며, 북으로는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의 사이를 아산만이 가로막고 있다.
이와 같은 내포의 지리적 위치는 전근대시기에 내포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진출하는 육로를 크게 제한하여 왔다. 우선 내포에서 충청도의 행정중심지인 공주와 통하는 길은 예산에서 차령을 넘어 유구를 거치는 길이 거의 유일하였다. 이 길은 공주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금강유역에 펼쳐진 금강문화권과, 가야산 자락에 펼쳐진 바다를 끼고 있는 내포문화권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44) 내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내륙으로 깊이 만입되어 있는 아산만을 빙 돌아 삽교천의 중상류에 놓여져 있던 다리나 나루를 건너야만 했다. 오히려 거리의 단축을 위해서는 대진나루를 이용하여 아산만의 하구 바다를 건너 평택으로 가는 것이 편리했다. 사실 내포지방에서는 육로의 불편함과는 달리 복잡한 해안선과 많은 포구를 갖고 있었으므로 수로가 더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내포의 이와 같은 지리적 환경은 내포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도록 한 측면도 없지 않다. 우선 우리 역사에서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개방되어 있을 때에는 내포지방이 바다를 통한 외국문물 수용의 창구 역할을 해 왔다.
특히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 이후, 내포지방은 중국문화의 초입지(初入地)로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선진적인 문화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던 항로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의 미비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현존하는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마애삼존불, 서산 운산의 용현계곡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의 사면석불입상 등은 이 지역이 중국 선진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였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최완수는 중국 석굴조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된 마애불 양식이 예산사면석불(보물 794호)로, 불상제작 시기는 무녕왕의 뒤를 이은 성왕(523-553) 때이며, 주불인 남면 석가여래좌상은 무녕왕의 초상조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위덕왕(554-597) 때에 성왕의 초상조각인 태안마애삼존불(보물 432호)을 조각했으며, 무왕(600-640) 초년 경에는 내포지역 미남미녀 상호와 특유의 미소를 나타낸 보다 세련된 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을 조각해 낸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들 내포지역의 마애불은 모두 사람 키 이상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불상들로서 당시 이런 규모의 불상제작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 어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실제로 백제문화의 중심지는 백제 해상세력의 근거지가 되고 있던 내포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 태안반도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던 세력은 진씨 일족으로 추정된다.45)
백제후기 내포지역의 수덕사에는 혜현(慧顯, 570-627)대사라는 고승이 있어 삼론학을 강의하고 법화경을 영송하여 대중을 교화하였다. 수덕사 혜현대사에 대한 기록은 당(唐)나라 태종 정관(貞觀) 19년(645)에 도선(道宣)율사가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 권 28 백제국 달나산 석혜현전(百濟國 達拏山 釋慧顯傳)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당시 내포지역의 불교 수준이 세계적이었다.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을 때에도 내포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부흥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도침(道琛, ?-661)대사는 수덕사 승려로 추측된다.46)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내포지역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이 지역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계곡에 보원사를 크게 중창해 짓고 화엄종찰로 삼아 이곳 불교를 장악해 가게 한다. 이에 보원사는 소위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 중의 하나로 손꼽혀 이후부터 이 지역 불교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 백성들의 반신라적인 감정은 더욱 골이 깊어 가 통일신라왕국이 통일의 여세로 극성을 보일 때까지는 변방의 망국 후예로 은인자중하고 있었지만, 차차 신라 왕실이 내분을 보이면서 해체되어 나가는 기미가 나타나자 옛 백제의 해상 전진기지 다운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 왕조의 주도이념이던 화엄종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념으로 새 사회를 건설해 가려는 신사조 운동이 맨먼저 일어나게 된다. 이 때 앞장선 인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의 실질적 개산조인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으로 그는 가야산 보원사 계단에서 계를 받은 내포출신 인물이다. 또한 내포의 남쪽 끝에 해당하는 성주산에는 낭혜화상이 847년(문성왕 9)에 성주산문을 개설하였다.47)
당진(唐津)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종래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 개칭된 것인데, 지명에서부터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역창구로 활용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조선후기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김정호에 의하여 편찬된 ≪여도비지(輿圖備志)≫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덕물도(德勿島)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당진에 상륙하였다고 하며,48)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방구암(防寇岩)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당군이 서해의 덕물도에 주둔했다가 일부 병력은 송악면 한진으로 상륙하고, 일부는 난지도를 경유 내륙으로 침입하기 위하여 상륙한 곳이 방구암이었는데, 당시 백제군이 이를 알고 사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상륙하는 당군을 격퇴하매 그들은 강 건너편 당진포리(唐津浦里, 현재의 당진군 고대면)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후대의 기록과 전설은 진위여부와 관계 없이 지역민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진포는 백제 때부터 당과 교역하던 포구로 백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당과의 왕래가 더욱 잦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진(唐津)이라는 지명까지 얻은 것으로 보아 당과 교류하는 대표적인 항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중국의 汴京(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떠나서 고려 수도인 개성의 예성항에 입항하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항로도 내포의 바닷가를 지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협계산(夾界山, 당시 중국과 이족의 바다경계) - 흑산(黑山, 대흑산도로 추정) - 군산도(群山島, 전라북도 군산시로 추정) - 횡서(橫嶼) - 자운섬[紫雲苫] - 부용산(富用山, 洪州 경내로 富用倉이 있다고 함)을 거쳐 마도(馬島)의 객관인 안흥정(安興亭)에서 청주(淸州) 수령의 예를 받으며 하루를 묵고, 이튿날 출항하여 구두산(九頭山) - 대청서(大靑嶼) - 화상도(和尙島) - 소청서(小靑嶼) - 자연도(紫燕島) - 분수령(分水嶺)을 경유하여 예성항에 입항한다.49) 그런데 1박을 했던 마도는 안흥정이 있고 여울이 험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현재의 태안군 근흥면 마도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마도가 청주 땅으로 고려의 국마장이 있었으며, 마도라는 이름도 관마(官馬)를 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내포지방은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南京)이었던 명초에는 양국의 사신이 직접 출입하는 지역이기도 하였다.50) 내포지방의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는 중국에서 해금정책이 실시되기 전인 고려전기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건너와 내포지방에 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태안이씨, 서산정씨, 소주가씨, 절강편씨 등의 입향과정을 통해서도 중국과 내포지방이 바닷길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측케 한다.
내포지역에서는 고려말에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고,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성리학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경직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51)
우선 고려말에 내포의 지식인들은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 성리학을 처음으로 연구 보급한 백이정(白頤正)의 묘소는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그곳에 그를 모신 신안사(新安祠)와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원래 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정치적으로 앞장선 사람은 안향(安珦)이지만, 원나라에 10년간 있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돌아와 이를 가장 먼저 연구․보급한 사람은 백이정이다. 그리고 백이정의 뒤를 이어 성리학 보급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이곡(李穀, 1298-1351)․이색(李穡, 1328-1396) 부자를 비롯한 한산이씨(韓山李氏)가문이다. 선초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이개(李塏, 1417-1456)는 이색의 증손자요, 기묘명현록에 올라있는 이자(李耔, 1466-1524)도 이색의 후손이다.
16세기 기호유학은 화담계열(花潭系列)이 중심이었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무인집안 출신으로, 제자를 받아들일 때 문호를 개방하여 양반뿐 아니라 양인‧천인에게까지 문하에 출입하게 했다. 이중 내포지방에 살던 인물로는 이지함(李之函)‧서기(徐起)‧홍가신(洪可臣) 등이 있다. 이지함(1517-1578)은 한산이씨로 보령사람이며 묘소는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에 있고 아산(牙山)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이지함은 화담의 영향을 받아 유학사상뿐 아니라 도가사상, 상수학(象數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상공업도 중시했다. 천문‧지리‧의학‧복서‧산수 등에 두루 능통한 박학풍(博學風)의 인물이다. 그는 정통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의(義)와 이(利)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하여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했다. 이러한 학풍은 그의 조카인 이산해(李山海)와 유몽인(柳蒙仁)‧김신국(金藎國)등 북인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서기(1523-1591)는 천인으로서 서자인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으로서 화담문하에 출입했다고 한다. 그는 만년에 공주의 공암에 살다가 그곳에서 묻혔으나, 원래 홍주의 상전리에서 태어나 40대까지 홍주에서 살았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했고, 조헌(趙憲)등과 함께 동방분야도(東方分野圖)를 고쳤다고 한다. 동방분야도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체계였다. 홍가신(1541-1615)은 화담의 제자인 민순(閔純 1519-1591)의 제자이다.52) 홍가신은 아산의 향현으로 홍주목사를 지낸바 있다.
17세기에 서인계열의 율곡학파가 정립되자 기호의 화담학파는 무너지게 되었고, 나아가 율곡학파 내에서 인성과 물성이 같으냐 다르냐를 놓고 인물성동이논쟁이 일어났다. 이는 율곡의 주기론을 보완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인데, 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낙론]과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이론[호론]으로 갈리었다. 호론의 중심인물인 남당 한원진은 내포의 결성현 남당리[현재의 홍성군 결성면 남당리] 출신이며, 그의 지지자들은 예산의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서산의 한간 김한록, 봉암 채지홍 등이 있다. 낙론의 지지자들은 주로 경기에 살았지만, 중심인물인 외암 이간은 온양의 외암리[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출신이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성리학계의 3대 논변 중의 하나인 인물성동이논쟁은 내포의 지식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내포의 지식인 중에는 인물성동이론에 끼지 않은 유명한 학자․정치인도 많았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로 대북의 영수이면서 영의정까지 지낸 아계 이산해(1539-1609,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묘소가 위치), 인조초 김장생․장현광과 함께 조정에 징소된 3대산림으로 예학에 뛰어났던 박지계(1573-1635, 신창사람으로 아산의 인산서원에 배향), 효종때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죽임을 당한 김홍욱(1602-1654, 정조대의 벽파 김구주의 조상으로 서산 사람, 성암서원 배향, 묘소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에 위치), 1611년(광해군 3)에 조광조․김굉필․정여창․이언적 등 4현(四賢)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좌천되었고, 김육이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기여한 유명한 학자관료요 교육이론가였던 포저 조익(1579-1655), 권필․윤근수․이호민 등과 함께 동악시단(東岳詩壇)을 만들어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글씨도 잘 썼던 동악 이안눌(1571-1637), 박지계와 조익의 문인이며 성리학과 예설에 밝았던 야곡 조극선(1595-1658), 숙종 때 오래 동안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수로, 결성에 우거(寓居)했던 남구만(1629-1711)), 홍주의 구봉산 아래 어재동(현재의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 어재동)에서 출생해서 정조대에 10년 독상(獨相)을 지낼 정도로 유명한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1720-1799) 등이 모두 내포인이다.
내포에는 성호학통의 실학자들도 많이 살았으니, 여주이씨인 이병휴(李秉休)‧이용휴(李用休)‧이삼환(李三煥)‧이철환(李철煥)‧이가환(李家煥)‧이재위(李載威) 등이 그들이다.53)
정산 이병휴(1710-1777)는 성호의 조카이며 고제(高弟)로서 성호좌파(星湖左派)의 수장이다. 그 문하에서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등 천주교를 신봉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성호의 가장(家狀)을 썼다. 혜환 이용휴(1708-1782)는 덕산현 장천리에서 태어나 외가인 덕산현 염곡에서 자라났다. 재야학자로서 문학(文學)에 밝았으며 음운학(音韻學)‧병학(兵學)‧농학(農學)에도 두루 달통했다. 고덕에 살면서 뱃길로 안산(安山) 성포리(聲浦里)에 있는 스승인 성호선생과 왕래하면서 연구에 몰두했는데, 그의 실학은 아들인 이가환(李家煥)‧외손 이승훈(李承薰) 또는 이학규(李學逵) 등에게 전수되었다. 금대 이가환(1742-1801)은 정조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학자관료였다. 채제공(蔡濟恭)의 후계자로 남인의 지주가 될 것으로 촉망받았으나, 정조가 죽자 천주교도로 몰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처형되었다. 우리 나라 역사‧풍속‧인물‧문학에 두루 밝았으며, 역시 고덕 땅에 살았다. 목재 이삼환(1729-1814)은 12세에 종조인 성호선생에게서 성호의 손자 이구환(李九煥)과 함께 수학했으며 부친인 이병휴의 학문을 전수했다. 역시 고덕 땅에 살았다. 이철환(1722-1779)은 성호의 종손이고 이재위(李載威)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물보≫(物譜)를 지었다. 내용을 작성한 것은 아버지 이재위이고, 편차를 정하고 책 이름을 붙인 것은 아들 이철환이었으며, 이기경(李基慶)이 발문을 썼다.
이외에도 유명한 고증학자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내포사람이다. 그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으며 지금도 고택(古宅)이 남아 있다. 송학(宋學)과 한학(漢學)을 절충한 고증학(考證學)의 대가였으며, 특히 금석학(金石學)에 밝아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인 북한산비(北漢山碑)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나 이른바 추사체(秋史體)를 개발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작품이다. 저서로서는 ≪추사집≫(秋史集)이 있으며 이상적(李商適)‧오경석(吳慶錫)등 중인 출신 인재들과 교유하여 영향을 미쳤다. 경주김씨이며 벽파(僻派) 집안의 인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가까웠다.
내포지역에는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폐쇄되어 있었을 때인 여말선초와 조선후기에 외국세력의 잦은 침투가 있었으니, 왜구침입과 이양선 출몰을 들 수 있다.
여말부터 한반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조선조 세종대까지 100여년간 해안지방 주민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의 주된 공격목표는 조운선과 조창이었으며, 홍수로 강물이 불었을 때에는 내륙 깊히 침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왜구로 말미암아 조운이 통하지 않아 개경의 창고가 텅비게 되었고, 공민왕 6년과 7년, 우왕 원년․4년․7년 등에는 관료의 녹봉지급에 차질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여말에 내포지방에 왜구가 침입한 사례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54)
공민왕 원년(안흥, 서주<서산>), 6년(결성, 홍주), 7년(면천), 9년(신평), 13년(내포), 18(예산․면천), 19년(내포), 21년(홍주, 양광도), 22년(태안-폐군)
우왕 원년(서주, 결성, 양광도 연해안), 3년(신평, 홍주, 이산<덕산>, 신창), 4년(태안, 덕풍<예산군 덕산면>, 합덕, 서주, 면천), 5년(여미<당진군 정미면>), 6년(결성, 홍주), 7년(이산, 서주), 11년(서주)
이와 같은 왜구의 침입은 조선초기에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태종 11년에는 경상도 연해변 주군(州郡)의 수령을 모두 문무겸비한 자로 택하여 차견하도록 하였고, 세종 즉위년에는 무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연해지방의 수령에 충원하여 왜구 방비를 하도록 명하고 있다. 따라서 내포지방에도 무관 수령이 많이 파견되었다. 또한 왜구 방비를 위하여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여말부터 세종대까지 해안방어의 임무를 부여받았던 무관직 수령들은 성을 쌓고 산지로 대피했던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만들었다. 이때 축성된 성곽들은 읍성․산성․진성 등으로 구분되는데 아산․예산․덕산․대흥․신창을 제외한 내포의 모든 읍에 축성되었고, 오천․안흥․평신․소근․서천포 등지의 수군진에도 축성하였다. 읍성이 없는 예산․대흥 등지에는 산성을 쌓았다.
조선후기의 내포지방에는 황당선(荒唐船)과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였다. 황당선과 이양선은 조선중기 이후 우리나라 연해에 출몰하던 소속불명의 배를 말하는데,55) 이 중에서도 서양의 배는 우리나라 배와 모양이 달랐기 때문에 이양선이라 불리웠다. 동양 침략에 열을 올리던 서양 세력은 정조 이후 조선으로 접근해 왔는데, 특히 순조 이후 자주 나타나 해역을 소란하게 하여 조선 정부에 두려움을 주게 되었다. 이 외국 선박들의 국적은 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이었다. 18세기 이전에는 거의 표류에 의한 불가피한 접근이었으나, 18세기 후반이래 이양선의 출몰은 정탐, 측량, 통상을 목적으로 한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접근이었다.56) ≪실록≫을 통해 충청도 연해에 나타났던 황당선과 이양선 기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544년(중종 39) 馬梁 앞, 남포 禿山島, 태안 麻斤浦, 荒唐船 1척
1546년(명종 즉위) 8월 馬島, 荒唐船 1척
1556년(명종 11) 7월 태안 禿津 荒唐船 1척(인가와 私船 약탈)
1559년(명종 14) 5월 남포현, 荒唐船 1척(왜적)
1634년(인조 12) 10월 태안 서해포, 唐船 1척(표류)
1639년(인조 17) 9월 보령 눌이도, 淸船 1척(의복 식량 약탈)
1655년(효종 6) 5월 堀業島 唐船 3척(防牌船을 습격)
1721년(경종 1) 윤6월 안흥진, 荒唐船(중국 등주인)
1738년(영조 14) 평신진 앞바다, 荒唐船
1794년(정조 18) 마량진, 荒唐船(중국 등주 황현인)
1816년(순조 16) 7월 마량진 갈곶, 異樣船 2척
1832년(순조 32) 6월 홍주 고대도, 異樣船 1척
1832년(순조 32) 7월 서산 간월도, 異樣船 1척
1846년(헌종 12) 6월 홍주 외연도, 異樣船 1척
1866년(고종 3) 2월 평신진 조도, 해미현 조금진, 異樣船 1척(통상요구)
1868년(고종 5) 4월 홍주 행담도, 異樣船 1척(옵페르트 일행)
1868년(고종 5) 4월 소근진 부근, 異樣船 1척
1869년(고종 6) 1월 소근진 부근, 異樣船 1척
바다를 끼고 있던 내포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택리지≫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내포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하여 생선과 소금을 만들었고, 이를 서울과 충청도의 내륙으로 드나들며 팔았으므로 일찍부터 상업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특히 내포에는 목화재배가 적절치 않아 내포의 생선과 소금을 유구의 목화와 바꾸어 가므로, 공주에서는 오직 유구만이 내포의 생선과 소금의 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57) 내포의 포구로는 하천의 수량이 많고 근원이 긴 아산 공세호와 덕산의 유궁포는 말할 것도 없고, 홍주의 광천과 서산의 성연도 비록 시냇물 항구이지만, 조수가 통하는 까닭에 발달한 포구였다.58)
서구의 선박이 도입되기 전까지 한국의 선박은 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었으므로, 조수를 이용하여 입항하였다. 즉 평저선은 밀물을 이용하여 해안가에 배를 대는데, 썰물에는 자연스럽게 갯벌 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과거의 포구는 갯벌이 넓게 발달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내포지방의 바다는 대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조차가 6-9m에 달하였으므로, 조수의 운동에 따라 토사의 자연적인 퇴적이 이루어져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갯벌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부터는 이와 같은 내포의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드는 해만 간척도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나아가 내포의 구릉지 개발과 해만 간척을 통해 확보된 농경지는 이 지역에 새로 이주하는 사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내포의 지명유래와 그 지역범위, 내포지역의 지형과 교통로, 내포지역의 지방제도와 통치구조,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징 등을 살펴보았다.
내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고려 공민왕대에 이르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지역은 전라도 조운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내포는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인 결성․해미․태안․서산․면천․당진․홍주․덕산․예산․신창 등을 지칭하며, 내포(內浦)의 기준이 되는 포(浦)는 삽교천의 유궁진으로 오늘날의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오서산의 북쪽에 해당하는 이 곳은 서쪽으로 서해바다를 끼고 있고, 북쪽으로 경기의 연해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동쪽으로 금북정맥의 본줄기에 있는 차령(차동)고개를 통해 공주와 연결된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내포는 유궁진의 하류인 범근내포를 중심으로 한 아산만의 수조처(범근내포, 공세곶, 경양포)를 지칭하기도 하고, 홍주진관에 속해 있는 18고을(湖西內浦十八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인(日人)에 의해 금강유역이 내포지방․내포평야라고 불리우는 착오가 범해지면서, 내포의 개념이 왜곡되어 한동안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한편, 오늘날의 천주교에서는 내포교회의 개념이 보다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가 처음 내포를 통해 전래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넓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가야산은 우리나라의 전통지리인식에 의하면, 백두대간을 근원으로 하여 갈라져 나온 금북정맥의 정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내포지역은 동으로는 죽산의 칠현산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는 금북정맥의 본줄기에 가로막혀 충청도의 내륙지방과 격리되어 있었고, 남으로는 오서산에서 보령의 진당산으로 갈라지는 금북정맥의 작은 갈래에 의해 구분된다. 이 곳은 지형이 대체로 완만하고 해안의 굴곡이 심한데다가, 바다의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곳곳에 안개[內浦]가 형성되는데, 그 가운데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삽교천 주위가 가장 크게 발달하였다. 내포의 교통로는 곳곳에 발달한 포구를 이용한 수로가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역로의 주요간선로에서 비켜 있었던 내포지역의 육로는, 서울에서 충청수영에 이르는 도로망과 함께, 서울로 가는 지름길인 대진나루, 충청도의 행정중심지였던 공주와 통하는 차령(차동)고개가 중요하였다.
조선시대 광의의 내포지역은 홍주목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서부지역의 20여 고을을 지칭하였다. 이들 각 고을에는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동은 있었지만,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할 때, 홍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가 부임하였고, 태안․서천․면천․서산․온양․대흥에는 종4품의 군수가, 홍산․덕산․평택․청양․비인․남포․결성․보령․해미․당진․신창․예산․아산에는 종6품의 현감이 각각 파견되고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내포지역의 고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과와 무과 출신 수령이 많이 부임하고 있었다. 특히 홍주목사와 결성현감․보령현감은 문과출신, 해미현감으로는 무과출신 수령의 부임이 관례였다.
조선시대 내포지역 수령 상호간에는 일반행정상으로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병렬적인 관계였지만, 군사적으로는 홍주진관의 관할하에 놓여 있어서, 홍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고, 각 고을의 군수는 병마동첨절제사, 현감은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 또한 조선후기의 영장제가 실시되자 충청도의 전영에 해당하던 홍주에는 정3품의 무신이 전영장으로 파견되었고, 좌영에 해당하는 해미의 경우에는 해미현감이 종2품직인 영장토포사를 겸하였다. 바다를 끼고 있던 내포지역의 수군은 전임(專任) 수사가 근무하던 수군절도영(수영)이 오천에 있었고, 종3품 수군첨절제사가 파견되던 거진(巨鎭)으로 소근포진과 마량진, 종4품 수군만호가 파견되던 당진포․파지도․서천포 등이 있었다. 내포지역의 역참조직은 조선전기에 금정도와 시흥도가 있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그 속역이 모두 금정도에 이속되었다.
내포의 지리적 조건은 내포의 독특한 역사적 특징을 지니게 하였다.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개방되어 있을 때에는 외국문물 수용의 창구역할을 하였으니, 고대 불교문화의 전래, 안흥과 당진항의 발달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폐쇄되어 있을 때에는 잦은 외국 세력의 침투가 이루어졌으니, 여말선초 왜구의 출몰과 조선후기 이양선의 출몰 등이 그것이다. 내포지역에서는 고려말에 성리학의 수용에 앞장섰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성리학적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내포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생선과 소금을 만들어 서울과 내륙을 드나들며 팔았으므로 이 지역에 상업이 발달하였고, 구릉지 개발과 해만간척을 통해 확보한 농경지는 사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주>
1) 본고의 작성에는 다음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추윤, ≪삽교천의 역사문화≫, 1995, 당진문화원.
오석민, ≪내포지방 문화관광개발을 위한 기초연구≫, 1999, 충남발전연구원.
최영준,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 ≪대한지리학회지≫34-4, 1999.
임선빈, 「조선후기 내포지방의 역사지리적 성격 : 천주교 전래와 관련하여」, ≪백제문화≫29, 200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최완수, 「내포지역의 불교」, ≪열린충남≫18, 2002. 1, 충남발전연구원.
이성무, 「내포지역의 지성사」, ≪열린충남≫18, 2002. 1, 충남발전연구원.
특히 위의 글 가운데 오석민의 연구는 최근의 내포지역 연구와 개발계획 수립을 촉진하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2) ≪고려사≫ 권40 세가 40 공민왕 13년(1364) 4월 정유
3) ≪고려사≫ 권42 세가 42 공민왕 19년(1370) 2월 기사
4) ≪고려사≫ 권114 열전 27 제신 邊光秀【李善】
5) ≪고려사≫ 권125 열전 38 간신 金횡
6) ≪擇里志≫ 八道總論 忠淸道條.
7) 崔南善, 『朝鮮常識 : 風俗․地理․制度編』第二 人文類 內浦와 維麻.
8) 김추윤, 앞의 책, 95쪽.
9) 申景濬(1712-1781)도 ≪四沿考≫ 沔川條에서 '保寧之烏棲山以北 洪州之北 大興禮山新昌之南 本郡之東 德山諸水 合北流戎津浦'라고 하면서, 다시 융진포에 대한 註에서 '戎津浦者 多由此渡 湖右諸邑之在此浦上下沿西者 稱以內浦'라고 정의하고 있다.
10) ≪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8월 경진조.
11) 『세종실록』권28, 세종 7년 6월 을축조.
13) 犯斤川은 犯斤乃浦라고도 불리웠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범근내포는 면천군 치소의 동쪽 27리 지점에 있었으며, 이곳에 창고가 있어서 공주․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稅米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하였는데, 成化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땅바닥에 교착하므로 아산의 貢稅串으로 옮겼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 산천조) 성화 14년은 성종 9년(1478)이다.
15) ≪세종실록≫권79, 세종 19년 11월 을미조.
16) ≪영조실록≫ 권45, 영조 13년 8월 계미조.
17) 『여지도서』충청도 홍주. 이 18개군현에는 홍주와 대흥이 빠진 것이다. 홍주는 홍주진관의 소속고을이 아니고 본진영이 설치되어 있는 고을이기 때문이지만, 대흥이 빠진 것은 편찬자의 착오인 듯 하다. 『여지도서』의 대흥군에서는 대흥이 洪州鎭營海美鎭左營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다.
18) ≪경국대전≫권4, 병전 외관직.
19) ≪선조실록≫권55, 선조 27년 9월 신묘조.
20) 최영준, 「19세기 내포지방의 천주교 확산」, ≪대한지리학회지≫제34권 제4호, 1999, 395쪽.
21) 盧道陽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지리학자에 의해 내포에 대한 개념의 왜곡현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東京女子高師의 野口保興 교수는 1910년에 ≪帝國大地誌≫를 간행하고, 그 속편으로 간행된 ≪續帝國大地誌≫ 韓國, 南滿洲編 錦江條에서 ‘錦江은 일명 鎭江이라고 하는데 (中略) 江景의 하류 40km 이상의 사이는 河幅 180-900m가 되고 40-50石을 실은 帆船이 통하고 40-50石의 小船은 江景 상류 80km까지 溯航할수 있다. 참으로 本江은 內浦地方에 많은 水運의 편리를 준다’고 하여 금강유역을 내포지방이라고 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간행된 ≪일본지리풍속대계≫17권 조선 하에서는 鈴木駿太郞이 집필한 忠淸南道條에서 ‘大田․論山․江景을 연하는 內浦平野’라고 하여 내포평야라는 표현이 보이기 시작하며, 1942년 古今書院에서 출간된 山本熊太郞의 ≪新日本地誌≫外地編에서는 ‘錦江中流에 內浦平野를, 下流에 全北平野(湖南平野)를 만든다’고 하였고, 다시 ‘錦江上流의 地는 忠淸南道에 속하여 湖南平野라고 부르지 않고 보통 內浦平野라고 칭하는 百濟의 故地이다’라고 하여 내포평야를 개념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금강유역을 내포, 내포평야라고 일컫는 왜곡된 지명의 사용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져,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盧道陽, 「內浦文化圈의 喚起」,≪內浦文化情報≫창간호, 1997. 4., 내포문화연구원, 8-11쪽)
22) 최완수, 「내포지역의 불교」, ≪열린충남≫18, 충남발전연구원.
23) 조선후기의 실학자 申景濬(1712-1781)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山經表≫는 1913년에 최남선이 조선광문회에서 출판한 적이 있으며, 1990년에 다시 박용수의 해설과 함께 간행되었다.(신경준 지음․박용수 해설, ≪산경표≫, 1990, 푸른산)
24) 오석민, ≪내포지방 문화관광개발을 위한 기초연구≫(1999. 5. 충남발전연구원) 33-34쪽.
25) 최완수, 「내포의 불교」(≪내포문화정보≫창간호, 1997. 4. 내포문화연구원), 57쪽.
26) ≪한국지명총람≫4(1974, 한글학회)에 의하면, 서산군(현재는 태안군)의 근흥면 마금리 안개[內浦](뿔안이 서남쪽에 있는 개), 근흥면 정죽리 안개[內浦](안가래미 북쪽에 있는 개), 남면 신장리 안개[內浦](안적돌 동쪽에 있는 개), 남면 진산리 안개(큰 말 동쪽에 있는 개) 등이 있다.
27) 최완수, 앞의 논문(1997).
28) 이는 김추윤의 ≪삽교천의 역사문화≫(1995, 당진문화원) 제4장 삽교천변의 포구와 도진을 근거로 정리한 것이다.
29) ≪島嶼誌≫上(충청남도․한남대학교충청문화연구소)의 제3장 문화배경과 역사적 변천(이해준 집필)에서 재인용(364쪽).
30) 앞의 책(이해준의 글)에서 재인용(363-364쪽).
31) 大津 : 治東北一百二十里 新北面界 通京捷路(『輿圖備志』洪州牧 道里 津渡)
32) 『인조실록』권4, 인조 2년 2월 갑오조
33) ≪大東地志≫卷5, 忠淸道 洪州 典故.
34) 이 가운데 공주․홍주․임천․태안․한산․서천․면천․천안․서산․온양․홍산․덕산․직산․정산․청양․은진․연산․니산․대흥․부여․석성․비인․남포․결성․보령․해미․당진․신창․예산․목천․전의․연기․아산 등 33고을은 오늘날의 충청남도에 속하고(오늘날의 충남을 구성하는 고을 가운데 금산․진산의 2고을은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속하였다), 충주․청주․단양․청풍․괴산․옥천․문의․제천․회인․연풍․음성․청안․진천․영춘․보은․영동․황간․청산 등 18고을은 충청북도에 해당하며, 회덕과 진잠은 대전광역시에 해당하고, 평택은 경기도에 속한다.
35) ≪여지도서≫에는 충청도의 목민관이 관찰사 1원(공주목사 겸임), 목사 2원, 도호부사 1원, 군수 12원, 현령 1원, 현감 37원, 판관 1원이며, ≪대전회통≫에는 관찰사 1원(공주목사 겸임), 목사 3원, 도호부사 1원, 군수 14원, 현령 1원, 현감 34원, 판관 1원이다.
36) 영장제에 대해서는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 영장제를 중심으로≫(1999, 혜안) 참조.
37) 이곳은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로, 갈매못 순교지(오천면 영보리)와는 약 2㎞의 거리에 위치한다.
38) ≪신증동국여지승람≫권19, 태안군 관방조.
39) ≪신증동국여지승람≫권20, 남포현 관방조.
40) 「대동여지도」에는 마량진이 비인에 보이고 남포에는 마량이 古鎭으로 나타남.
41) 이는 勅令第九十七號 監營按撫營竝留守廢止件과 勅令第九十八號 地方制度改正件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고종실록≫권33, 고종 32년 5월 병신조)
42) ≪경국대전≫권4, 병전 외관직.
43) 1791년의 신해박해와 1795년의 주문모신부 변복잠입사건이 터진 후, 정조가 수세에 몰린 다산 정약용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좌천시켰을 때, 금정도 찰방은 내포지방 전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44) 필자는 선언적이기는 하지만, 아래의 글에서 충남의 전통문화권을 ‘내포문화권’과 ‘금강문화권’으로 양대분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임선빈, 「21세기를 향한 충남의 신 정신문화 창조」(≪열린충남≫15, 충남발전연구원, 1999. 4.).
-----, 「지역문화의 위상과 방향」(≪지역발전연구≫7, 대전대학교 지역발전연구소, 2000. 2.).
45) 최완수, 「내포지역의 불교」, ≪열린충남≫18, 2002. 1., 충남발전연구원, 66-69쪽.
46) 최완수, 위의 논문, 69-70쪽.
47) 최완수, 위의 논문, 70-75쪽.
48) 百濟義慈王二十年唐蘇定方自登萊渡海駐軍德勿島因泊唐津(≪輿圖備志≫唐津縣 武備條 戰略), 百濟義慈王二十年唐將蘇定方駐軍德勿島泊唐津下陸(≪大東地志≫唐津 典故條)
49) ≪선화봉사고려도경≫제34권 海島條-제37권 馬島條.
50) 이는 김추윤의 연구에 의한 것으로 처음에는 양자강의 남쪽인 남경에서 가장 근거리인 태안반도의 안흥항이 이용되다가, 후에는 홍성 결성의 안흥정, 당진군 고대면의 당진포 등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김추윤에 의해 제시된 당시의 내륙 교통로는 다음과 같다.(김추윤, ≪삽교천의 역사문화≫, 당진문화원, 1995, 109-110쪽)
① 안흥-태안-서산-해미-덕산-한티고개-봉소원(유숙)-삽교-신례원-신창
② 결성-덕산-수덕고개-봉소원-삽교-신례원-신창
③-1 당진포-채운교-당진-면천-현화교(삽교천)-녹야리석교(무한천)-신례원-신창
③-2 당진포-채운교-당진-면천-돈곶포(삽교천)-신창
51) 이하 내포지역의 성리학에 대한 서술은 이성무, 「내포지역의 지성사」, ≪열린충남≫18, 2002. 1, 충남발전연구원, 76쪽-87쪽 참조.
52) 韓白謙․尹孝全(尹鑴의 아버지)․洪履祥 등도 민순의 제자이다.
53) 내포의 실학자에 대해서는 李佑成, 「내포지역의 실학자」, ≪내포문화정보≫창간호(1997. 4., 내포문화연구원) 44-51쪽 참조.
54) 이는 ≪고려사≫CD(서울시스템)의 倭․倭寇 검색기사와 ≪당진군지≫상권(1997, 당진군) 제2편 역사(신양웅․윤석효 집필)의 295-299쪽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55) 荒唐船은 원래 중국의 배를 唐船이라 부른데서 기인한다.
56) 조선에 처음으로 문호 개방과 교역을 정식으로 요구한 이양선은 1832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에 나타난 영국 상선 암허스트 호였다.
57) 州西北有茂盛山 … 內有麻谷寺維鳩驛 西踰一峴卽內浦也 內浦不宜木綿 海戶浦漵之民 以魚鹽多 貿綿於此 故公州惟維鳩綰內浦魚鹽之利. (≪擇里志≫ 八道總論 忠淸道條)
58) 內浦則牙山貢稅湖德山由宮浦 水大而源長 洪州廣川瑞山聖淵 雖溪港而通潮 故並爲商船居留轉輸之所.(≪擇里志≫ 卜居總論 生利條)
P. 윤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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