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생활 688

사강시장

사강으로 이사온지 6개월이 되었는데, 시장은 거의 안 가본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시장이 축소되기도 했고, 5일장이기 때문에 날짜 맞추기도 힘들고.... 사강시장은 2일, 7일에 장이 선다. 이번에는 날짜를 기다려 작정하고 장구경을 나섰다. 나는 두부와 김을 살 예정이다 설밑이어서 그런지 장도 제법 열리고,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시장에서 파는 구운김이 맛있다고 하길래 사려고 갔더니, 줄이 쭈~~~~욱 한 20여분 기다려서 김을 샀다. 두부와 묵을 함께 파시는 아저씨도 찾았는데, 벌써 다 팔고 가셨나보다 ㅠㅠ(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두부와 김을 사려고 했었는데, 김만 성공 돌아오는 길에 떡국떡이 보이길래 그것도 사고~ 집까지는 걸어서 왔다. 한 15분정도 걸리니까 춥지 않으면 걸어 다니면 좋을 듯~

Tim Vos 할아버지의 한국전참전증명서(6.25사변종군기장수여증)

2009년 6월 우리 가족은 네덜란드 상주연구원으로 발령난 남편과 함께 독일 국경에 인접한 네덜란드 베네콤이란 동네에 정착했다. 한국교회를 찾지 못한 우리는 베네콤에 있는 네덜란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에서 Tim Vos 할아버지를 만났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I am a Korean’이라고 하시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를 당신 집에 초대해 주셨다. 7월에 할아버지 댁을 처음 방문하였는데, 당신의 한국전 참전 이야기를 오랫동안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한국전 당시의 지도, 전쟁사진, 흑색군복, 관련 책자와 엽서 등등... 집에 돌아온 나는 한달에 한번쯤은 들려서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자는 다짐을 했었는데, 할아버지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수시로 전화하시고 우리 ..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에메 세제르, 프랑수아즈 베르제 지음, 변광배 옮김, 출판 그린비, 2016)를 읽고~

1. 서론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서 왜곡되고 박탈당한 흑인의 정체성과 인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네그리튀드 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에메 세제르와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전문가인 프랑수아즈 베르제의 대담형식의 책이다. 프랑스령인 레위니옹섬에서 태어난 프랑수아즈 베르제는 2004년에 마르티니크의 세제르를 찾아가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대담을 나눴다. 식민지 프랑스에 대한 그의 분석, 식민 제국의 붕괴에 참여한 남녀 세대 곁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 마르티니크라는 세계, 흑인들의 세계, 인간과는 거리가 먼 세계, 이 세계에 대한 그의 꿈·죄·공포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세제르의 시나 극 작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주제, 가령 노예제도, 사죄..

코로나확산으로 인한 취미생활의 변화

1. 서론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된지 2년이 지났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 놓았다. 언젠가는 이 사태가 끝이 나겠지만,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대면 관계를 줄이고, 이동을 자제하는 삶의 패턴이 고정화되고 있어 코로나가 끝나도 예전과 같은 삶을 누리기는 힘들 거라는 전망이 현실로 다가온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코로나 19의 영향은 향후 수년 혹은 수십년간 전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고, 어디에 살며, 어떤 삶을 영위하든지 모든 부분에서 코로나 19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주 40시간 근무제가 널리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고 취미의 종..

나혜석

나혜석은 근대 최초의 여성 유화가이자,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섰던 여성문학을 구연한 작가이자, 봉건적 관습에 저항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여성해방론자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1986년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나혜석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도 갔다. 도쿄의 조선 유학생 사회에서 나혜석은 여성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 문인으로도 빛을 발했다. 나혜석이 최초로 쓴 글인 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을 가정 안에 묶어두는 현모양처론을 부정하며,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자각을 가진 여성으로서 현대사상을 이해하고 지식과 품성으로 그 시대의 선각자가 되는 것이 이상적 부인이라고 주장했다. 에서는 그때까지 여성에게 미덕이라고 강요되어 온 것을 거스르고 나아가..

세계종교의 현황과 역사적 전개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는 약 79억 명의 인구가 있고, 그중 종교인구가 약 70억 명으로 전체의 89%를 차지하는 것으로 봐서는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가 종교를 믿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종교인구를 종교별로 보면 그리스도교가 33%, 이슬람교 24%, 흰두교 13%, 불교 7%의 순서로 보고되어 있다. 세계 종교인구의 분포를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도교 인구가 가장 많은 대륙은 유럽이고, 그 밖에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북아메리카 등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그중에 천주교가 가장 많다. 이슬람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단연 인구수가 많으며, 유럽에서도 그리스도교 다음으로 영향력있는 종교로 부상되었다. 흰두교는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중 90% 정도가 인도에 몰려 있어 여전히 ..

화성시 소개

한반도 중앙부인 경기도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는 화성시는 서해안에 접해 있고, 육지부 해안선 길이는 54.9㎞로, 경기도(219.93㎞)의 약 1/4에 달한다. 화성시 면적은 약 693.93㎢로, 화옹방조제와 시화방조제 건설로 조성된 간척지에 아직 지번이 부여되지 않아 해당 면적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면적의 산출이 어렵지만 서울의 1.4배에 이른다. 화성 지역은 한강 유역에서 호남의 평야 지대와 서해안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았다. 현재 화성시의 교통망은 서쪽에서부터 평택시흥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봉담-동탄)가 화성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고, 이 외에 경부고속도로, 평택화성고속도로, 수원광명고속도로 등이 있다..

19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점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구문화라고 하는 것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공통적·주류적으로 등장을 하는데, 한국에서 고급문화라고 하면 서양 고급문화를 일컫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서양 고급문화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굉장히 천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의 대중문화는 식민지시기에는 주로 기생(권번)이 무대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부대, 1970년대에는 호텔지하 나이트클럽을 중심의 공연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가 80년대가 지나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3저 호황으로 인해 중산층이 등장하고 소비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이때부터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산업화 초기의 우리 사회에서는 눈앞의 경제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고,..

메튜 아놀드, 오르테가 이 가세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중문화 비판

우리나라에서 대중문화를 저속하고 천박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처럼, 서양에서도 대중문화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이 많았다. 19세기 말 노동계급의 구매력이 상승하고 여가시간을 즐기게 되면서 ‘대중’이 사회를 대표하는 이들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대중들이 문화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는데, 대중들의 취향이 사회를 휩쓸면 문화 전반의 수준이 낮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메튜 아놀드’의 비판 영국의 문학비평가 ‘메튜 아놀드’는 그의 책 에서 ‘문화는 인간의 생각과 표현의 정수로서 현재보다 더 나은 고상함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이는 서구 귀족들만의 문화가 진정한 문화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말이다. 또 그는 노동계급이 향유하는 문화에서는 고상함을 찾아볼 수 없고, 노동계급 구성..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원인

스탈린 시대의 경제적 근대화는 역설적으로 소련 침체의 원인이 되었다.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 방식은 소비재 산업을 경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수준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계획경제 체제는 생산기술 혁신에 대한 노동자들의 주도권을 가로 막았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한 미국과의 군비경쟁과 우주개발 사업은 가뜩이나 어려워지고 있던 소련 경제에 더욱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선출은 그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개혁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재건과 개방을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양대 슬로건으로 내세운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를 완화하고 국영 기업들에게 독립 경영을 허용했으며,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를 민영화했다. 또 언론..